1881년 경북 문경에서 출생했다. 1910년 7월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을 졸업했다. 유학시절 태극학회에 가입했으며, 고학생동맹 설립에 참여했다. 대한학회 조직하고 편집부원 · 평의원, 대한흥학회 편찬부원 · 회계부원 · 평의원 · 총대 · 총무 등을 역임했다. 귀국 후 보성전문학교 강사로 부임했으며, 교수 · 교감을 거쳐 1920년 교장이 되었다. 1920년 7월 조선체육회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초대이사장으로 선출되었고, 1921년 회장에 선임되었다. 같은 해 한양구락부 이사, 보성법률상업학교 재단법인기성회 위원, 임시조선인산업대회 위원, 동서학우회 간사, 1922년 민립대학기성준비회 발기, 1924년 8월 조선여자강습후원회 조직 등에 참여 활동했다. 1938년 6월 동광생사주식회사(東光生絲株式會社) 감사 및 사장, 8월 조선축구협회 회장에 선임되었다.
일제강점기 식민지배에 적극 참여했다. 1911년 8월 되어 경무총감부 사무과에 배치되어 2년간 근무했다. 일본정부로부터 1915년 대례기념장, 1932년 국세조사기념장, 1934년 서보장 등을 받았다. 1924년 4월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1925년 전라남도 참여관, 1927년 경상북도 참여관, 1929년 평안남도 참여관, 1930년 평안북도 참여관을 역임하고 1933년 전라북도 지사가 되었다. 이외에도 임시조사교육위원회 위원촉탁, 참여관으로 재직시 문관보통징계위원회 위원 · 위원장, 보통시험 위원, 문환보통분한위원회 위원장, 산금협의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1935년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로 수록되었다. 1939년부터 1945년 해방 때까지 중추원 참의로 활동했다.
1938년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순회강연반 연사 및 1939년 이사, 1940년 8월 재만조선인교육후원회 위원, 이해 10월 국민총력조선동맹 이사와 연성부(鍊成部) 연성위원, 1941년 8월 흥아보국단 준비위원 상임위원, 이해 9월 조선임전보국단 준비위원 및 부단장, 1944년 2월 종로총궐기위원회 특별위원, 이해 9월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 발기인 등의 직책을 맡아 적극적인 친일활동을 했다. 1942년 5월 매일신사가 주최하는 징병제도실시대강연회에서 ‘징병제 실시와 우리들의 감격’이라는 강연을 했다. 해방 후 친일행적으로 반민족행위특별조사를 받아 1949년 7월 특별위 검찰부에 송청되었으며, 1950년 7월 하순경, 저명인사들이 납북될 때 그도 함께 납북되었다.
고원훈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9·11·13·17·18·19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312∼371)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