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5년 충청남도 부여에서 출생했다. 가정에서 한학을 수학했으며, 1902년 4월 외부(外部) 견습생으로 입학하여 1903년 3월 졸업했다. 1903년 외부(外部) 주사로 임용되어 동래감리서 주사, 옥구감리서 주사, 창원감리서 주사, 창원부 주사, 성진부 참서관, 성진항재판소 검사, 함경북도 사무관 등을 역임했다.
일제강점 이후 조선총독부 관리로 영흥군수, 안변군수, 함경남도 지방토지조사위원회 임시위원, 함경북도 문관보통징계위원회 위원, 함경북도 참여관, 함경북도 보통시험위원, 평안남도 참여관, 전라남도 지사, 경상북도 지사, 중추원 참의 등을 지내면서 일제 지배정책에 협력했다. 일본정부로부터 1912년 한국병합기념장, 1915년 다이쇼[大正]대례기념장, 1921년 훈6등 서보장(瑞寶章), 1925년 훈5등 서보장, 1928년 쇼와[昭和]대례기념장, 1931년 훈3등 서보장 등을 받았다.
관직 이외에 1930년 일본 수양단 조선지부 성격인 수양단조선연합회본부 평의원, 1933년 조선신궁 설치 10주년 기념사업을 위해 결성된 조선신궁봉찬회 경북지부장, 1934년 반공주의를 내세우며 전쟁에 대비해 조직된 관제 단체 경북국방의회연합회 회장을 지낸 바 있다.
특히 안변군수로 재직 중 관내에서 일어난 3·1운동을 진압한 공로로 조선총독부로부터 크게 인정받았다. 이 일로 대한민국임시정부로부터 현상(懸賞) 인물로 지목되었다. 1929년 10월 「전남 산업의 진전과 장래」라는 글을 발표했으며, 1930년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당시 조선총독과 남원 광한루에서 「남원 광한루에서」라는 한시를 지은 적이 있다.
김서규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9·17·19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2: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845∼858)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