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생조합운동 ()

근대사
사건
조선농민공생조합에서 전개한 농촌계몽운동.
정의
조선농민공생조합에서 전개한 농촌계몽운동.
역사적 배경

조선농민공생조합(朝鮮農民共生組合)은 천도교청년당의 부문 단체인 조선농민사(朝鮮農民社)가 협동 생산, 협동 판매를 통한 농민 대중의 경제적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조직한 단체이다. 천도교에서는 1920년대 초반 중산계급 이하 농민층의 경제적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조합 설치론과 공동경작론을 주장하였다. 1925년 8월 17일 천도교청년당 임시총회에서 농민 단체를 조직하기로 하고, 10월 29일 조선 농민의 교양과 훈련을 목적으로 하는 조선농민사를 창립하였다. 조선농민사는 농민의 경제적 이익 획득을 도모하기 위해 1926년 중앙에 알선부를 설치하고, 지방 농민사에서도 알선부를 설치하도록 하였다. 알선부는 1931년 4월 조선농민공생조합[이하 공생조합]으로 변경되었다.

경과

공생조합은 중앙에 본부, 지방에 군 공생조합, 면 공생조합, 리 공생조합이 설립되었으며, 생활권을 바탕으로 연합회가 설치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군 단위로 공생조합이 설립되자 이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1933년 8월 중앙에 조선농민공생조합중앙회를 조직하였다. 1932년 6월 현재 조합수 181개소, 조합원 3만 8000여 명, 조합자금 25만여 원에 이르렀다.

공생조합운동은 ①천도교의 주의를 민중에게 선전하는 것, ②민중에게 당면의 이익을 제공하면서 민중 스스로 사회경제를 운영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하는 것, ③조합원 상호간의 경제적 부조만이 아니라 천도교청년당 혹은 조선농민사나 조선노동사의 물질적·정신적 원조자를 획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공생조합은 소비부, 생산부, 신용부, 이용부, 위생부 등 5개의 부서를 두었지만 소비부 사업이 가장 활발하였다.

공생조합은 농민의 경제적 이익 획득 운동과 공동경작 운동을 전개하였다. 경제적 이익 획득 운동은 소비부 사업과 생산부 사업으로 요약된다. 소비부 사업은 염매시(廉賣市)를 개최하여 보다 싼 가격에 생필품을 농민에게 제공하였으며, 생산부 사업은 평양에 농민 고무공장을 설립하여 조합원들에게 저렴한 가격으로 고무신을 제공하였다. 공동경작 운동은 공작계를 조직하여 공동경작, 양돈, 양봉, 날품팔이, 노역, 공장 노동, 나무심기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였다.

결과 및 의의

공생조합운동은 천도교청년당의 조선농민사 알선부 사업을 확대 개편한 것으로 농민층의 경제적 이익 획득을 주도한 대표적인 천도교의 농촌계몽운동이었으며, 일제의 식민지 수탈에 대항하여 농민의 이익을 대변하였다. 그러나 만주사변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된 일제의 농촌진흥운동으로 인해 공생조합운동은 쇠퇴하였으며 1936년 4월 조선농민사가 해체되면서 공생조합운동은 사실상 막을 내렸다.

참고문헌

「농민공생조합의 실제와 이론을 논함」(승관하, 『농민』, 1932.6)
「조선농민공생조합의 작금」(승관하, 『농민』, 1932.6)
「공생조합은 왜 하는가」(김형준․박신덕, 『신인간』58, 신인간사, 1932.7)
「농민공생조합 규정」(동우, 『농민』, 1932.9)
「공작계 설치의 실제」(유효,『신인간』 65, 1933.3)
「조선농민사의 연혁」(전조선농민사 편집실, 『조선농민』, 1936.6)
「일제하 조선농민공생조합의 조직과 활동」(조성운, 『동학연구』 13, 동학학회, 2003)
「한국농협운동의 선구-조선농민사와 조선농민공생조합운동-」(오익제, 『한국사상』 5, 한국사상연구회, 1962)
집필자
성주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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