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8년 6월 20일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에서 설립한 교육기관으로 현재 중앙중·고등학교의 모체이다.
일제의 한국침략이 노골화된 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을 기점으로 뜻있는 우국지사들이 국토의 주권과 독립을 보존하기 위하여 의병활동·언론·교육활동 등을 전개하였다.
교육문화 활동은 교육과 문화를 진흥시켜 국가·사회 체제를 개혁하고 실력을 배양하여 자강(自强)을 이루어 일제의 침략을 저지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교육활동은 정부·선교사·민간인 등에 의하여 활발히 전개되었다. 민간인들에 의한 교육활동에는 지방적인 특색을 띤 여러 학회가 조직되었다.
1906년 10월에 함경도 인사를 중심으로 설립한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 1907년 西北學會로 개칭)를 비롯하여 11월에는 개성의 개성교육회(開城敎育會), 12월에 평안도황해도의 서우학회(西友學會), 1907년 3월에는 광학회(廣學會)·대동학회(大東學會), 7월에 전라도의 호남학회(湖南學會), 1908년 1월에 기호지방(畿湖地方, 서울경기도·충청도 지방을 칭한다)의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 3월에 강원도의 관동학회(關東學會)와 경상도의 교남교육회(嶠南敎育會), 11월에 흥사단(興士團)·호서학회(湖西學會)·청년학회(靑年學會) 등이 각 지방의 인사들을 중심으로 설립되어 활발하게 움직였다.
기호흥학회는 기호지방의 인사들을 중심으로 1908년 1월 19일 서대문밖 천연정(天然亭)에 있는 보성소학교 내에서 임시의장 이종일(李鍾一)과 이우규(李禹珪), 정영택(鄭永澤) 등의 발의로 창립총회를 개최하여 설립되었다. 창립총회에서 회장에 이용직(李容稙), 부회장에 지석영(池錫英), 총무에 정영택(鄭永澤) 그리고 수 명의 평의원을 선출하였다.
기호흥학회의 설립목적은 대한제국의 독립기초와 국민의 자유정신을 함양시키고, 기호지방의 교육을 진흥시켜 애국사상을 고취하는 데 있었다. 학회 사업으로 월보 간행과 기호 각 지방에 지회(군단위)를 설립하여 교육과 문화사업을 전개하였다.
월보(月報)는 1908년 8월 25일 창간하여 회원의 교양(學海集成의 란을 두어 신지식을 보급)과 학회소식 등을 전하였다. 그리고 지회를 설립하여 지방의 교육사업을 촉진하였다.
특히 지방의 향교(鄕校)를 사립중학교로 전환시키고자 노력하였다. 학회의 회원은 고관대작에서 행상·천민이 모두 그 대상이 되었으며, 기호지방 외의 사람도 회원이 될 수 있었다. 회원수는 2,000여명에 이르렀다.
학회 건물은 1908년 5월 6일 한성 북부 소격동에 있는 군부소관의 전 육군위생원을 빌렸다. 같은 달 18일에 다시 교동(校洞)에 있는 학부소관의 전 법어학교(法語學校) 건물을 빌려서 이공하다가 같은 해 11월 화동(花洞)으로 옮겼다. 학회의 재정은 찬조금과 월 회비로 충당하였다.
기호학교는 1908년 5월 20일 기호흥학회 임시평의원에서 총무 정연택의 학교설립의안을 제출하고 6월 1일 특별총회에서 이를 가결함으로써 6월 20일에 개교식을 가졌다. 교명(校名)은 사립기호학교(私立畿湖學校)로 정하였으며, 교사(校舍)는 소격동(군부소관 전 육군위생원)에 있는 기호흥학회 구 회관을 사용하였다.
설립목적은 지방의 교육이 교사 부족으로 발전을 하지 못함으로 교사를 양성하기 위한 사범교육과 중등교육을 실시하는 데 있었다.
교육내용으로는 수신(修身)·교육·학교관리법·지문 및 지지(地文及 地誌) 역사·물리·화학·박물(博物)·산술·어학·경제·법학·농학대요(農學大要)·도화(圖畵)·음악·체조 등이었다.
설립초기에 교육과정으로 본과와 특별과를 두었다. 본과는 중등교육 과정으로 3년을 이수하여야 했으며, 특별과는 사범교육과정으로 1년 6개월을 이수하여야 했다. 특별과는 1909년 12월 1일에 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으며, 1910년 1월 10일 폐지되었다. 따라서 중등교육과정인 본과만 남게 되었다.
1908년 6월 20일에 개교를 하고 7월 11일에 하기휴가를 시작하였다. 후 학기는 9월 1일로 정하였으며 사정회(査定會)는 4월에 실시하여 학생들의 포상과 진급을 정하였다. 그리고 졸업식은 12월에 했다. 학생선발은 한문에 능통한 20세 이상의 사람으로, 지리·역사·산술대요 등에 대한 시험을 통해 선발하였다. 규정된 학생정원은 없었다.
1908년 6월 15일 최초의 학생모집에서 본과와 특별과를 합해서 95명을 입학시켰으며, 같은해 9월 후 학기에 새로 입학 모집한 학생은 본과 40명, 특별과 76명으로, 기호학교의 총 학생수는 200여명에 이르렀다.(1908년 9월)
학교의 조직은 창립시 교장 윤효정(尹孝定), 교감 이원식(李源生), 학감 이항직(李恒稙), 교사로 이상익, 이장노, 유병필, 유옥겸, 현귀, 정만조, 정하명이었다. 1908년 9월 13일 통상총회에서 교장으로 박승봉, 교감으로 김경식(金瓊植)을 선임하였다.
교사의 담당 교과목은 정만조(독서·작문), 유병필(역사·생리), 유옥겸(법학·교육학), 이장노(화학·박물학·일어), 김하정(산술·일어), 유일선(심리·물리·수신), 이광종(지리), 김인식(도화·7창가), 이항직(체조), 조희철, 유치훈, 남기석 등이었다. 후에 교감직과 학감직은 기호흥학회의 임원이 겸직하였다.
학교재정은 기호흥학회로부터 지원받았다. 기호흥학회는 기부금과 월 회비 등이 수입기반이었는데, 수입금의 1/3 이상이 기호학교의 재정으로 충당되었다. (기호흥학회 월보 회계원 보고 참조) 따라서 학회와 학교는 재정난이 심하였다.
기호학교는 창립 초에 공공건물을 빌려서 사용하였으므로 교사(校舍)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2대 교장인 박승봉은 개인소유 가옥을 기부하여 이를 기금으로 한성 북부 화동(花洞)의 가옥을 구입하여 큰 건물 3채와 작은 건물 2채를 증축하였다. 1908년 12월 이곳에 학회와 학교가 이전하였다. 기호학교가 독립된 학교건물을 가지게 된 것이다.
또한 1909년 6월에 교사(校舍)를 확장하기 위하여 각계에 재정적 지원을 요청하였다. 이때 재학생들이 낸 기부금이 330원에 이르렀다.
1908년 10월 추계 운동회가 있었다. 경기 종목은 400보경기 조(조), 기장(騎長)경주, 각저(角觝) 등이었다. 우승자에게는 미국독립사 5위인소사(五偉人小史), 부사필독서(父師必讀書), 와싱톤전, 을지문덕전 등과 같은 서적과 연필, 공책 등의 문구류가 상품으로 주어졌다. 운동회가 끝난 후에는 만세삼창을 하였다.
1910년 기호흥학회가 호남학회·교남교육회·관동학회를 통합하여 중앙학회(中央學會)로 개칭되고, 기호학교는 재정 곤란과 교사(敎師) 확보의 어려움으로 개편이 필요했다.
1907년 12월 유길준(兪吉濬)에 의해 설립된 사립융희학교(私立隆熙學校)를 1910년 9월 11일에 병합하여 1910년 11월 22일에 교명(校名)을 사립중앙학교(私立中央學校)로 개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