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상규(吳相奎)·이준(李儁)·유진호(兪鎭浩)·설태희(薛泰熙)·이동휘(李東輝)·이종호(李鍾浩)·강용구(康瑢九)·윤익선(尹益善)·이재성(李載聖)·태명식(太明軾)·주우(朱瑀)·김주병(金㴤炳)·양효건(楊孝健)·강윤희(姜玧熙)·정진홍(鄭鎭弘) 등 함경도의 인사들이 1906년 10월에 조직하였다.
국권을 회복하고 민권을 신장하는 데 궁극 목표를 두고, 민지(民智)의 개발을 통한 실력의 양성과 단합(團合)을 당면과제로 삼았다. 이 단체는 한성에 중앙회(中央會)를 두고 회장 1명, 부회장 1명, 평의원 20명, 간사 10명, 서기 2명을 두었다. 지방에는 지회(支會)를 설치해 중앙회의 지도 아래 각 지역의 활동을 운영하게 하였다.
회원의 자격은 함경도민으로서 국권회복을 염원하여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주어졌다. 회원의 사회적 신분은 주로 신흥시민층·신지식층·중하급관료 등이었다. 활동은 구국운동·계몽강연·토론운동·청년운동 등으로 전개되었다. 교육구국운동은 세 가지 측면에서 전개되었다.
첫째, 국민들에게 국권회복을 위한 신교육의 절실한 필요를 계몽해 학교를 설립하고 신교육을 실시하도록 지도하였다. 둘째, 한북학교를 설립해 교육구국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였다. 이종호·오상규 등의 재정적 후원으로 설립된 한북학교는 신교육을 담당할 교사를 양성하는 사범학교로서 역사·지지(地誌)·물리·수신·교육·법률·경제·산술·체조 등의 교과목을 교과과정으로 정하였다.
함경도의 많은 인사들이 한북학교의 운영에 재정 지원을 했으며 학생들에게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셋째, 함경도 지역의 각 사립학교의 교무를 찬성하였다. 각 학교 교육이 진정한 구국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교과과정, 교과서 선택, 교육의 내용, 교사선정, 학교의 재정 등을 지도하였다.
이와 같은 교육구국운동으로 함경도에 다수의 사립학교가 설립되고 구국을 위해 투쟁하는 국권회복 운동가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계몽강연·토론활동은 일반 민중을 계몽해 민지를 개발하고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해 전개되었다.
이 단체의 총회·간친회·친목회·운동회·토론회를 통해 이루어졌고, 설태희·정진홍 등이 대표연사로 활약하였다. 청년운동은 서북학생청년회의 운영을 통해 전개되었으며, 함경도민이 국권회복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데 공헌하였다. 1908년 1월 서우학회와 통합해 서북학회로 개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