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우학회는 1906년 10월 관서 지역 인사들을 중심으로 서울에서 조직되었던 애국계몽단체이다. 대한자강회·기독교청년회·국민교육회를 비롯하여 평안남북도와 황해도 출신의 전·현직 무관집단과 언론인 등을 중심으로 조직하였다. 독립협회·만민공동회·개혁당운동·헌정연구회 등 정치 활동에 참여한 개화자강파(開化自强派) 노선의 지식층이 주도하였다. 국권 회복과 인권 신장의 기초로서 교육진흥운동을 전개하여 서우학교를 설립하고, 기관지 『서우(西友)』를 간행하였다. 계몽강연활동을 통해 애국계몽운동을 광범위한 대중운동으로 전환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 · 기독교청년회(基督敎靑年會) · 국민교육회(國民敎育會), 전 · 현직 무관집단과 언론인 등 평안남북도 · 황해도 출신의 지식인을 중심으로 1906년 10월 조직하였다.
이러한 인사들은 독립협회 · 만민공동회 · 개혁당운동 · 헌정연구회 등의 일련의 정치활동에 참여한 개화자강파(開化自强派) 노선의 지식층이었다. 이들은 을사조약에 의한 사태의 근본적인 변동에 대처하여 종래의 개화운동을 국권회복운동으로 전환시켰다.
박은식(朴殷植) · 김병희(金秉熹) · 신석하(申錫廈) · 장응량(張應亮) · 김윤옥(金允玉) · 김병일(金秉一) · 김달하(金達河) · 김석환(金錫桓) · 김명준(金明濬) · 곽윤기(郭允基) · 김기주(金基柱) · 김유탁(金有鐸) 등이 발기하였으며, 정운복(鄭雲復) · 강화석(姜華錫) · 유동작(柳東作) · 최재학(崔在學) · 안병찬(安秉瓚) · 이갑(李甲) · 유동열(柳東說) · 노백린(盧伯麟) · 이유정(李裕楨) · 옥동규(玉東奎) · 정재화(鄭在和) · 박경선(朴景善) · 이달원(李達元) 등이 중심이 되었다.
서우학회는 국민교육회, 대한자강회, 황성기독교청년회와 전현직 무관그룹 등을 기반으로 지역단위의 단체로 조직되었다. 이들은 민족적 위기의식을 최대한 결집시켜 국권회복의 의지를 키우고 민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지역인을 대상으로 차근차근 쌓아 올려야 한다고 보아 각성이 비교적 빠른 관서지역에 지역단위의 단체를 설립하였다.
이 학회는 정치활동을 표면에 내세우지 않고 학회라는 명칭으로 교육진흥운동만을 표방하였다. 그러나 실제적 목표는 ‘민력양성(民力養成)’을 통한 국권 회복과 인권 신장이었다. 즉, 서우학회는 국권회복과 국민주권의 자유독립국가를 수립하는 데 목표가 있었던 것이다. 국권회복의 기초로서 국민의 실력과 단결을 중요시하여 이를 위한 여러 가지 사업을 전개하였다.
조직과 구성원을 보면, 중앙회를 서울에 두었으며, 각 지역에는 지방사무소와 지회를 두었다. 회원은 1,000명에 달하였다. 이들의 사회적 위치는 신지식층 · 신흥시민층 · 중하급관료 · 무관 등으로 당시 새로이 사회지도층으로 대두하고 있었던 계층이었다.
중앙임원진에는 회장, 부회장 겸총무, 평의원, 교무원, 교제원, 회계원, 서무원, 서기, 서찰원을 두고 월보간행을 위한 주필, 편집, 협찬원을 두는 한편 새로운 사업을 추진할 때마다 비상임위원을 선정하였다. 지방에는 지방권유위원을 파견하였으며 지방사무소, 지회를 설치 운영하였다. 지방사무소와 지회는 평안도의 각 지역 25곳에 설치했다.
주요활동은 교육운동으로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양성의 지름길을 교육이라고 인식하여 근대교육보급과 대중운동으로의 전환에 노력하였다. 통상회(通常會) · 간친회(懇親會) · 친목회 · 운동회 등을 통해 국민들에게 국권회복을 위한 신교육의 필요성을 계몽하였다. 또 지회 · 지방사무소 · 도권유위원(道勸諭委員) 등을 통해 각 사립학교의 교무를 찬성하기도 하였다.
서북학생 친목회(西北學生親睦會)를 통해 청년학생들을 지도하여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서우학교(西友學校)를 설립하여 신교육을 담당할 인재를 양성하기도 하였다. 기관지로 『서우(西友)』를 간행하였다. 『서우』는 1906년 12월부터 매달 발행되어 14호까지 발행되었다. 핵심사상은 국권회복을 목표로 한 실력양성론을 기반으로 삼고 있었다.
계몽강연활동을 통해 일반 민중의 지식을 계발하고 애국심을 고취시키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민중 계몽을 위해 내놓은 이론은 개화자강파의 논리를 계승, 발전시킨 애국계몽사상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사회진화론(社會進化論)과 실력양성론 · 민권론(民權論) · 애국론 · 교육구국론 · 단체론 · 실업구국론 · 사회관습개혁론 등이었다.
이러한 활동은 성과가 대단히 커서 민중들의 열렬한 호응을 받았을 뿐 아니라, 관서지방에서 애국계몽운동이 가장 열렬히 전개되는 배경이 되었다. 이 학회의 애국계몽운동과 사상은 서북학회 · 신민회로 계승되어 국민의 각성과 실력양성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1908년 1월에는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와 통합하여 서북학회(西北學會)로 되었다.
서우학회의 활동은 각기 위기의식을 느끼던 대중을 분발케 하여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하게 함으로써 몇몇 선구자에 의해 전개된 운동을 광범위한 대중운동으로 전환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를 계기로 관서지방은 국권회복운동의 요함이 되었으며 많은 운동가를 탄생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