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명은 휘선(彙璿), 호는 추정(秋汀). 평안남도 평원출신. 아버지는 이응오(李膺五)이다.
1896년 상경해 독립협회에 가입했고, 1898년 11월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의 간부로 활동하다가, 이해 말 독립협회가 해산될 때 일시 구금되었다.
이후 한국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였다. 일본으로 건너가 세이죠학교[成城學校]와 육군사관학교 보병과를 졸업하고 1904년 귀국, 이해 9월 대한제국 육군 참령(參領)이 되었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을사조약을 강제체결하자 군인직을 사임하고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에 종사하였다.
1906년 10월 박은식(朴殷植)·정운복(鄭雲復)·김붕준(金朋濬) 등 동지들과 함께 서우학회(西友學會)를 창립, 구국교육운동의 주동적 역할을 하였다. 1907년 4월 양기탁(梁起鐸)·안창호(安昌浩)·전덕기(全德基)·이동휘(李東輝)·이동녕(李東寧)·유동열(柳東說) 등과 함께 창립위원이 되어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를 창립하였다.
7월 고종의 양위를 반대하다가 어담(魚潭) 등 군인 출신 인물들과 함께 일시 투옥되었다. 1908년 1월 서우학회와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를 통합해 서북학회(西北學會)를 창립, 애국계몽운동의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09년 10월 안중근(安重根)의 이토포살사건[伊藤博文砲殺事件] 때에 안중근과의 친분관계로 헌병대에 구속되어 잔혹한 고문을 받고 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신민회가 만주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기지를 창설하려고 간부를 제1차로 망명시킬 때 선발되어, 1910년 4월 안창호·유동열·신채호(申采浩)·김희선(金羲善)·이종호(李鍾浩) 등과 함께 칭다오[靑島]를 거쳐 노령으로 망명하였다.
그 뒤 만주의 밀산(密山)에서 무관학교를 설립, 교장이 되어 교포 자제들에게 애국교육과 군사교육을 실시하였다. 노령에서 이강(李剛)과 함께 『정교보(正敎報)』를 발행, 언론을 통한 독립운동과 계몽활동을 하였다.
이듬해 미국에 가 있던 안창호의 주선으로 『신한민보(新韓民報)』 주필로 초청되었으나, 미국의 상륙허가를 받지 못하였다. 그 뒤 시베리아로 가서 대한인국민회원동지방회(大韓人國民會遠東地方會) 회장을 역임하였다. 만주 길림성 목릉현(穆陵縣)에서 죽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