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출신 인사들과 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남궁 억(南宮檍)을 회장으로 하여, 부회장에 정봉시(鄭鳳時), 총무에 고원식(高源植), 평의원으로 정호면(鄭鎬冕)·이시영(李時榮)·박기동(朴起東)·차상학(車相學) 등 28명, 그 밖에 간사원으로 김세기(金世起)·김교면(金敎冕), 회계에 서상영(徐相英), 서기에 정규완(丁奎完) 등으로 조직되었다.
설립 목적은 당시 실질상의 국권 침탈 상황에서 국권 회복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교육과 민중의 계몽이 중요함을 각성한 인사들이 민중을 계몽, 교육함으로써 항일 의식을 고취시키고자 한 것이었으며, 아울러 동향인의 단결과 협조를 꾀하기 위한 것이었다.
원래 1907년 7월동도흥학회(東道興學會)로 발족해 1908년 3월 관동학우회로 발전하였고, 곧 관동학회로 개칭하였다. 조직은 서울에 중앙회를 두고, 각 지역에 지회를 설립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설립된 서북학회·기호학회·교남교육회 등의 학회도 각 지방 출신 인사들이 출신 지역의 민중 계몽과 지역 문화 향상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운영 경비는 당시 200여 명의 회원들의 입회금 1환과, 월회비 10전으로 충당하였다. 그리고 학회의 활동은 교육구국운동·계몽강연운동·청년운동 등의 사업에 중점을 두고 전개되었다.
교육구국운동은 대체로 두 가지 측면에서 전개되었는데, 첫째 민중들에게 신교육의 필요성을 계몽해 학교를 설립하고 신교육을 실시하도록 지도하였으며, 둘째 강원도 각 지역의 사립학교 교무를 지도해 학교의 교육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였다. 특히, 학교 존폐의 관건이 되었던 재정에 관해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학회의 부속 기관으로 직접 사립학교를 설립해 운영하기도 하였다.
계몽 강연 활동은 일반 민중을 계몽해 민지(民智)를 계발하려는 것으로, 당시 저명한 연사들을 초빙해 자주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청년운동은 관동학회가 학우회에서 출발한 만큼 활발히 전개되었다.
국가의 앞날이 청년들에게 달려 있음을 주지시키고 학문에 정진할 것을 촉구하였으며, 특히 재경 유학생들을 지도하는 데 주력하였다. 이로써 일제 침략에 대항하는 주권 의식과 민족 의식을 고취시켜 자주 독립 국가의 정신적 지주로 발전시키는 데 주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