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학회 ()

호남학보
호남학보
근대사
단체
1907년 7월서울에서 조직되었던 애국계몽단체.
정의
1907년 7월서울에서 조직되었던 애국계몽단체.
개설

주도인물은 강엽(姜曄)·고정주(高鼎柱)·강운섭(姜雲燮)·백인기(白寅基)·유희열(劉禧烈)·박영철(朴榮喆)·최준식(崔俊植)·양회원(梁會源)·김낙구(金洛龜)·박남현(朴南鉉)·소석정(蘇錫政)·김봉선(金鳳善)·윤경중(尹敬重)·박해창(朴海昌)·김경중(金璟中)·이기(李沂) 등 전라남북도 출신 인사들이다.

설립목적

회의 목적을 호남지역의 교육 발달에 두고 주권수호운동을 전개하였다.

기능과 역할

조직으로 임원회와 평의원회를 두고, 임원으로 회장·부회장·총무원·교육부장·재무부장 각 1명, 서기원·회계원 각 2명, 간사원 10명 및 찬성원 약간 명을 두었다.

창립 초기 회장은 다소 교체가 있었으나 고정주가 선출되었다. 회원의 자격은 20세 이상으로 전라남북도에 현주소를 두거나 출신자에 한하였다. 서울에 중앙회를 두고 지방에 지회를 설치하였다.

전라북도 지방 29개소, 전라남도 지방 23개소, 서울과 남해에도 각각 지회가 있었다. 1910년경 회원이 565명에 이르렀다. 재정은 입회금 50전, 월연금 10전, 기부금 등으로 운영되었으나 궁핍한 편이었다.

활동은 교육구국운동·학보간행·계몽강연·토론회 등에 역점이 두어졌다. 특히, 교육운동을 중시해 지방의 임원과 회원을 촉구, 호남 각 지역 사립학교의 진흥을 꾀하고 서울에 유학 중인 호남 출신 학생들을 후원하였다. 법학강습소·측량학교도 설치해 직접 인재를 양성하였다. 또, 강연회와 토론활동을 통해 민중의 계몽과 주권수호의식을 강조하였다.

기관지인 『호남학보』 7는 교육구국론·실력양성론·단결론·실업구국론·애국론·사회폐습개혁론 등을 주장하며 계몽사업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재정사정으로 1908년 6월 1호가 발행된 뒤 1909년 3월 9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되었다. 1910년 8월 통감부의 압력으로 해산될 때까지 이 회는 호남지역인들의 계몽운동에 공헌하였다.

참고문헌

「호남학회(湖南學會)에 대하여」(이현종, 『진단학보(震檀學報)』 33, 1972)
『관보(官報)』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황성신문(皇城新聞)』
『호남학보(湖南學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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