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초 역관(譯官) 양성을 목적으로 세워졌는데 규정상에는 교육목적이 '중국어를 습득하여 실무에 적합한 인재를 양성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수업연한은 3년, 학년은 3학기제였고, 교수는 4인, 서기는 1인으로 규정되어 있었다. 이 때, 한국인으로 오규신(吳圭信)·유광렬(柳光烈)·이명칠(李命七)·최영년(崔永年) 등이 교사로 재직하였다.
1906년 10월 24일에 부교관 오규신(吳圭信)이, 1907년 8월 28일에 부교관 유정열(柳廷烈)이 학교장으로 임명되었다.
관립한어학교가 1906년 9월 1일 칙령 제40호 「학부직할학교 및 공립학교관제」에 의하여 관립한성한어학교(官立漢城漢語學校)로 개칭되었다. 학교 위치는 견지동우정국(郵政局) 자리였다. 1891년 일어학교가 설치될 무렵 차이하오(査以蒿)라는 교관을 중국에서 초빙하여 중국어를 교수하였으나, 청일전쟁으로 문을 닫았다가 1897년 5월에 다시 후윈웨이(胡文韋)를 불러 한어학교를 개설하게 되었다. 1905년에 후윈웨이가 귀국하자 그 대신 두방성이 오게 되었다.
1900년부터는 「외국어학교규칙」에 의하여 입학연령은 15세 이상 20세까지로 하였다. 개설 당시에는 입학생이 35명이나 되었다. 교과목은 중국어(회화, 습자, 번역, 쓰기, 작문) 외에 수신, 국어, 한문, 산술, 역사, 지리, 이과(理科), 법제경제, 부기, 체조 등으로 규정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중국어 중심이었고 일반 교양과목은 거의 가르치지 못했다.
1906년 공포된 「외국어학교령 外國語學校令」에 의하여 한성외국어학교(漢城外國語學校)로 통합되어, 교사를 교동으로 이전하였다. 그 당시의 학생수는 54명이었고, 1910년까지 졸업생 59명을 배출하였으나 1911년 일제에 의하여 폐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