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교육을 목적으로 1894년 서울 박동(礴洞: 育英公院 자리)에 설립되었다가 1895년 농상공부(지금의 세종문화회관자리) 뒤편으로 이전하였다. 1883년에 동문학(同文學)과 1884년에 육영공원을 설립하여 영어교육을 실시한 바 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뒤에 다시 외국과의 교섭상 영어습득의 필요성이 절실하여 이 학교를 설립하게 된 것이다.
1895년 5월에 「외국어학교관제」와 1900년 6월에 「외국어학교규칙」이 공포됨에 따라 다른 외국어학교와 같은 학제로 운영되었다. 수업연한 5년, 3학기제로 편성하여 입학연령을 15세 이상 20세 이하로 하였으며, 교수 6명과 서기 1명으로 규정하였다.
교과목으로는 영어(독해, 문법, 번역, 작문, 지리, 산수), 한국 지리와 역사, 논어, 체조 등이었다. 학년은 1, 2, 3, 4학년으로 나누고 각 학년마다 성적과 우수성에 따라 갑(甲), 을(乙), 병(丙), 정(丁)의 학급으로 구분하여 수업을 받게 하였다.
초기에 학생들의 복장은 모두 한복 두루마기에 갓을 쓰고 가죽신을 신도록 하여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영어학교 교장은 윤태헌(尹泰憲)이었고, 외국인 교관 프램턴(G. R. Frampton), 동문학에서 영어를 가르쳤던 핼리팩스(Halifax, T. E.)와 허치슨(Hutchison, W. F.) 등이 있었고, 한국인으로는 안명호(安鳴護)·김우행(金佑行)·정일범(鄭一範) 등이 있었다.
수업 시간은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였다.
1901년에 70명이었던 재학생이 1906년에 127명으로 증가하였는데, 이는 일찍부터 미국과의 교섭이 활발하였기 때문이다.
1906년에 발포된 「외국어학교령」에 따라 1907년 한성외국어학교로 통합되었다. 1910년까지 졸업생 총수는 79명이었으며, 통합된 한성외국어학교는 1911년에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