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5월 10일 「외국어학교관제」가 공포됨에 따라 그해 10월에 프랑스어를 교수하여 역관(譯官)을 양성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한성법어학교는 수업연한 5년, 3학기제로 하여 교수 4명, 서기 1명으로 되어 있었다. 학교개설 당시에는 건물이 없어 정동 프랑스공사관 앞 마르텔(Martel,E.)집 식당에서 18명의 학생으로 출발하였으나, 그 뒤 한성아어학교(漢城俄語學校)와 함께 육영공원(育英公院)의 자리로 옮겼다. 1906년 재학하던 학생 44명 대부분이 역관 집안 출신이었는데, 차츰 양반 자제들도 입학하기 시작했다.
묄렌도르프(Mollendorff,G.von, 목린덕(穆麟德)) 밑에서 상해세관(上海稅關)에 근무한 바 있는 마르텔이 부임하여, 개교할 때부터 1911년 폐지될 때까지 교관으로 있었다. 그에게서 가장 처음 프랑스어를 배운 사람 중에는 이능화(李能和)가 있었다. 육교시사의 동인 이원긍이 역관들과 어울리며 외국어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아들을 법어학교에 입학시킨 것이다. 그는 졸업하기 전에 이미 교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영어, 한어 등에도 천부적인 소질을 보였다. 한문책을 외우던 서당교육의 영향으로, 문법체계가 비슷한 서양어도 빨리 습득한 것이다.
초기의 교수로는 프랑스인 마르텔과 한국인 이능화·안우상(安于商)·김한기(金漢箕) 등 4명이 있었다. 이능화는 1906년 9월에 법어학교 교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교과목은 1900년의 「외국어학교규칙」에 따라 프랑스어를 교수하는 외에 일반 학과목도 교수하였다.
1906년 공포된 「외국어학교령」에 의하여 한성외국어학교(漢城外國語學校)로 통합되었다가 1911년 일제의 조선교육령에 의해 폐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