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하동 출신이다. 1924년 서울에서 중동학교를 졸업한 후 4월에 연희전문에 입학했으나 7월에 중퇴하고 일본으로 갈 준비를 하였다. 1925년 4월 일본 동경 와세다대학 전문부 정치경제과에 입학했으나 약 1년 만인 1926년 3월에 퇴학을 당하였다.
이 후 계속 동경에 있으면서 재동경조선청년동맹,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에 가입하였다. 또한 사회주의를 연구하는 진보적 서클인 신흥과학연구회(기관지 『신흥과학』 발간)의 발기인이 되었으며, 사상단체 일월회(一月會)에 가입하는 등 사회주의운동에 가담하였다. 1927년 4월 한국 내 제3차 조선공산당의 일본 내 지부였던 일본부(책임비서 박낙종)에 입당하였다.
1928년 2월에는 제4차 조선공산당의 일본총국(책임비서 한림) 동경 남부 야체이카에 배속되었다. 1928년 6월 한국으로 귀국해 1930년 6월 이종림(李宗林)과 함께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고향인 경상남도 지역을 맡았다.
1931년 2월 한자리에 모인 고경흠 등의 공산주의자들은, 당을 재건하는 문제보다, 그것을 위한 예비적 단계로서 노동자에 대한 정치적 교양사업이 우선되어야 함을 역설,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을 조직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들은 비밀리에 조직을 건설하기 위해 서울 중심부에서 떨어진 영등포 등의 근교에서 권대형을 중앙집행위원 및 서기국 책임자로 선출, 코민테른-프로핀테른의 정책실현을 추구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는 조선공산당의 소부르주아적 성격을 불식하고 대중적 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해 혁명적 노동자와 농민이 그들의 전위대를 형성할 수 있도록 지원하라는 지시로서, 코민테른 제6회 대회 후인 1928년 12월 10일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정치서기국이 채택한 「12월테제」와 1930년 8월의 프로핀테른 제5회 대회 후 이 대회의 결정에 기초해 프로핀테른 집행위원회가 9월 18일에 작성한 「9월테제」의 기본 전제였다.
이들은 두 달 후인 1931년 4월 10일 영등포에서 만나, 조선공산당재건설동맹이 단체 내에서 파벌투쟁을 일으킬 위험이 많다는 이유를 들어 해산을 결정하였다. 당면 임무를 좌익농노조 건설로 규정하고 일반에게 널리 알리는 통일적 조직체는, 지금 시기에서는 파벌이란 비난을 받을 염려가 있으므로, 이것을 결성할 시기가 올 때 조직하기로 하고 동맹을 해체했던 것이다.
과거 ML계였던 권대형 등은 이 시기 다른 공산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혁명적 노동-농민조합 결성에 매진할 것을 맹세하고 이를 위해 책임을 분담, 출판부를 담당하기로 결정하였다.
일제의 재건설동맹에 대한 검거에서 간신히 몸을 피한 권대형·서인식·이종림 등은 1931년 7월 25일 대구에서 전위조직 해체에 따른 일종의 연락기관으로서 조선공산주의자협의회를 조직했으며, 권대형은 그 책임자가 되었다.
권대형은 서인식(徐寅植)과 함께 출판 업무를 맡아 『코뮤니스트』·『봉화』 등을 발행하였다. 이는 조선에 공산주의를 선전할 자료가 부족하다는 현실 인식에서 나온 결과물이었으나, 이후 검거의 단서가 되었다.
권대형은 협의회의 곤란한 재정 사정에 직면하자 자금을 구하기 위해 영등포를 떠나 지방으로 돌아다녔는데, 이런 활동을 통해 세력을 강화하고 새로운 지방조직을 창설했다고 한다.
이런 작업의 일환으로 권대형 등은 1931년 9월 경상남도 양산에서 조직된 경남적색농민조합동부위원회를 배후 조종했으며 12월 하순부터 다음 해 2월까지 전라남도 광주에서 회합을 갖고 전남노동협의회를 배후 조종하였다.
1932년 3월경 검거되어 1933년 4월 20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6년을 선고(구형 7년)받은 이후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발굴되어 있지 않다. 권대형이 주도했던 동맹과 협의회는, 일제시대에 당을 재건하기 위한 조직적 시도로서는 마지막 것이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