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해 7월 7일 낙원동 173번지에서 홍명희(洪命熹), 김찬(金燦), 구연흠(具然欽), 원우관(元友觀), 박일병(朴一秉) 등의 발기로 조직되었다.
“소련, 일본, 중국 등지에서 홍수와 같이 팽배하게 몰려오는 신사상을 연구해 조리 있는 갈피를 찾아보려는 목적”을 표방한 사상단체였다.
일본 유학생 출신들이 주축이었다. 이 단체의 발기인 가운데에서 윤덕병(尹德炳), 이준태(李準泰), 원우관, 박일병 등은 무산자동맹회의 간부였다. 그리고, 홍명희, 김찬은 동경유학시대에 김약수(金若水) 등과 사상적 친분관계를 맺고 있었다.
처음에는 이론 연구와 강연회, 토론회를 개최하고, 이론서와 잡지의 간행을 당면 사업으로 추진하였다. 그러나 1년 후인 1924년 11월 19일에 간부회의 명칭을 ‘화요회(火曜會)’로 개칭하고, 종전의 연구단체로부터 행동단체로 전환하였다. 화요회라는 명칭은 칼 마르크스의 생일이 화요일이었던 것에 근거를 둔 것이었다.
이 때의 회원 수는 60여명으로서, 동경에 있었던 이른바 사회주의 사상가, 이론가의 대부분이 이 단체에 가입하고 있었다. 그리고 상해에서 귀국한 박헌영(朴憲永), 김단야(金丹冶) 등의 운동가들도 참가하였다.
이후 화요회는 조선공산당의 창당과 사회운동을 주도하게 된다. 김찬, 홍증식(洪璔植), 조봉암(曺奉岩) 등은 조선공산당 창건의 주역이고, 박헌영 등은 신흥청년동맹(新興靑年同盟)과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 창립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화요회는 이영(李英), 김사국(金思國) 등의 서울청년회와는 대립관계에 있었다. 반면에, 동경 유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북풍회(北風會)와는 협력관계를 유지하였다. 결국 1925년 3월 25일 화요회와 북풍회는 합동을 결의하고,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를 결성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