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정은 일제강점기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중국으로 건너가 유악한국혁명동지회, 재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 중국공산당 상하이시위원회에 가입하였다. 1930년 일본으로 건너가 무산자사, 노동계급사 결성과 조선공산당재건투쟁협의회에 참여하였다. 1932년 11월 일제 경체에 체포되어 1936년 순국하였다.
1906년 평안북도 박천에서 태어났다. 보통학교를 2년간 다니다가 중퇴하였다.
1927년 2월 중국 우창〔武昌〕으로 건너가 김원봉(金元鳳) · 유자명(柳子明) 등과 교유하면서 유악한국혁명동지회(留鄂韓國革命同志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중국 중앙군사정치학교 우한분교〔武漢分校〕를 졸업하였다. 1929년 1월 중국국민당 정부 직할 상해비행창(上海飛行廠)에서 육군 중위로서 근무하면서 사회주의운동가들과 교유하였다. 또한, 재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 중국공산당 상해시위원회 등에 가입하였다.
1930년 1월 도쿄로 건너가 고경흠(高景欽)이 주도한 무산자사(無産者社) 설립에 참여하였다. ML파 ‘조선공산당재조직중앙간부’의 양명(梁明)‧ 한위건(韓偉健) 등의 지시를 받은 김소익과 당 재건운동을 협의하였다. 4월 적색구원회(赤色救援會)와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에 가입하였고, 11월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1930년 12월 귀국하여 평안남도 일대에서 권대용(權大用) 등과 조선공산당재건투쟁협의회를 결성하였다. 1931년 2월 일본에서 계몽적 출판사를 조직하고, 조선공산당재건협의회 일본출판부를 결성하며 일본공산당의 지원을 받기 위해 도쿄로 다시 건너갔다.
1931년 8월 고경흠‧김삼규(金三奎) 등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무산자』 발간이 어려워지자 김두정(金斗禎) 등과 1932년 1월 노동계급사(勞動階級社) 결성에 참여하여 서기국 중앙상임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일본공산당으로부터 ‘일국일당주의(一國一黨主義)’ 차원에서 노동계급사의 해산을 종용받자 해산을 결정하고 일본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일본공산당 중앙위원회 조선부 책임을 맡고 야체이카(세포)에 배속되었다.
1932년 8월 다시 귀국하여 활동하던 중 11월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으며, 1933년 3월에 기소되어 5년간 예심에 회부되었다. 고문 후유증으로 1935년 10월에 형 집행 정지되었으나,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1936년 2월 7일 순국하였다.
2007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