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석(權泰錫)의 본적은 경상북도 김천이지만, 1895년 충청북도 영동에서 태어났다. 호는 몽우(夢牛)이다. 명문세가이자 한말 고위 관료를 배출한 집안에서 성장하였다. 함양 안의공립보통학교를 중퇴하고 상업에 종사하였다.
1919년 서울에서 3 · 1운동을 겪고, 최익환(崔益煥)을 통해 조선민족대동단에 가담하였다.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하고 격문 등을 작성해 배포하는 등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같은 해 5월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1920년 1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등으로 징역 1년 6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1년 6월 출옥하여 청년운동과 사회 활동을 계속하다가, 1924년 10월 서울파 비밀결사 조직인 고려공산동맹의 창립에 참여하였다.
1926년 7월 조선물산장려회 계열 등과 연합하여 민족 단체 통일기관으로 조선민흥회(朝鮮民興會) 결성을 주도하여 상무위원 등을 지냈다. 같은 해 10월 재건된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였고, 12월 조선공산당 제2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조직부원에 선임되었다. 1927년 2월 신간회가 결성될 때 민흥회의 신간회 합류를 주도하였다. 신간회 창립 시 서무부 총무간사에 선임되었고, 신간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민족주의자들과 협력하였다.
화요파, 서울파, 상하이파 등 구 공산 그룹을 망라하였던 조선공산당은 ‘영남친목회사건’을 계기로 분열하였다. ML파가 당 중앙집행위원회를 장악하였고, 이에 반발한 세력이 당대회 준비위원회를 구성하여 1927년 12월 제3차 당대회를 개최하였을 때 권태석은 운동 방침에 관한 테제를 제출하였다. 1928년 1월 『조선일보』에 ML파를 비판하고, 민족통일전선을 강조하는 글을 게재하였다. 10월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1929년 4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6년 형을 언도받고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1934년 6월 출옥하였다. 출옥 후에는 공산주의운동과 거리를 두었다.
1945년 8 · 15광복 이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결성에 가담하여 조선건국준비위원회와 민족주의 세력 간의 협력에 앞장섰다. 군소 우익 정당의 통일운동 결과로 1945년 12월 신한민족당이 결성되자, 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정치국 차장에 선임되었다. 1946년 1월 우익 비상정치회의주비회(非常政治會議籌備會)에서 활동하여 비상국민회의에 참석할 대표를 심사하는 심사위원에 선임되었다. 1946년 4월 한국독립당, 신한민족당, 국민당의 우익 정당 통합 운동 시 신한민족당 대표로 참석하여 한국독립당으로 합당에 찬성하였다. 통합 한국독립당에서 조사부장이 되었고, 당헌과 당규를 수정하는 데 참여하였다.
1947년 5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 참여를 주장하다가 한국독립당 전당대회에서 제명당하였다. 같은 해 6월 모스크바 3상 결정을 지지하는 한국독립당 세력을 규합하여 민주한독당을 창당하였다. 12월 민족자주연맹 결성에 참여하여 중앙상무집행위원, 총무국 차장에 선임되었다. 1948년 남북협상에 참가하기 위해 북한으로 가는 길에 해주에서 죽었다.
2006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