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범은 일제강점기, 조선노농총동맹과 북풍회, 만주 정통단에서 활동한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부산 출신으로, 재일 사상단체인 코스모구락부 회장을 지냈고, 1923년 1월 북성회에 참여하였다. 1924년 1월 부산노동동맹회 집행위원, 3월 남선노농동맹 창립대회 임시의장, 4월 조선노농총동맹 창립대회 전형위원 및 상무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비밀결사 고려총국 국내부와 까엔당에 하였고, 사상단체 건설사 북풍회에 참여하였다. 1926년 중국 지린〔吉林〕에서 무장단체 정통단(正統團)을 결성하여 단장이 되었다.
김종범(金鍾範)은 1891년 경상남도 부산부 영주동(현 부산광역시 중구 영주동)에서 태어났다. 필명은 추산(秋山)‧천일(川一)이다.
1921년 4월 부산 예월회(例月會)의 간사에 선임되었다. 또한, 조선청년회연합회 제2차 정기대회에서 의사원(議事員)에 선임되었다. 조선교육개선회 창립에도 참여하였다. 5월 『동아일보』에 「조선교육 문제에 관하여」 논설을 기고하였다. 6월 『동아일보』 부산지국장이 되었다. 7월 조선인산업대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8월 부산주택난구제기성회 발기에 참여해 부산시민대회 실행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9월 부산부두노동자 총파업 때 쟁의를 지원한 혐의로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12월 조선가스전기회사의 횡포에 항의하기 위한 시민대회 교섭실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2년 1월 부산청년회 총무부 간사가 되었고, 3월 부산 차가인조합(借家人組合) 결성에 참가하여 창립총회에서 임시의장에 선임되었다. 1922년 7월 『동아일보』 지국장을 사임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니혼대학〔日本大學〕 사회과에서 수학하였다. 9월 일본 도쿄 신칸현 조선인노동자학살사건조사회가 주최한 대중 연설회에 연사로 참여하였다. 일본재류조선노동자상황조사회 간부가 되어 12월 오사카에서 열린 재일조선노동자동맹 창립총회에 참석해 임시의장이 되었다.
김약수(金若水)‧정태신(鄭泰信) 등이 결성한 ‘재일본조선인공산단체’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김약수 등과 사상단체인 적우회(赤友會) 결성을 주도하였고, 1923년 1월 적우회와 시월회(十月會)가 합동하여 북성회(北星會)를 결성하자, 이에 참여하였다. 한편, 코스모구락부 회장으로 선임되어 1923년 1월, 일본무산자동맹으로 단체 가맹을 주도하였으며, 선언 기초위원과 연설회 위원에 선임되었다.
1923년 7월 귀국하여 서울‧평양‧대구‧광주 등지에서 북성회 순회 강연단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9월 서울청년회와 운동 노선의 차이로 마찰이 일어나 서울청년회 소속의 최창익(崔昌益)을 구타한 사건인 일명 ‘장안여관사건’으로 일시 구금되었다. 1924년 1월 부산노동동맹회 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3월 광주에서 전라도노농연맹 창립을 주도하였다. 또한, 대구에서 열린 남선노농동맹 창립대회에서 임시의장으로 선임되었다. 4월 조선노농총동맹(朝鮮勞農總同盟) 창립대회에 참가하여 전형위원, 상무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김재봉(金在鳳) 등의 주도로 중립당, 북성회파 등이 연합하여 결성한 비밀결사 고려총국 국내부에 참여하였다. 1924년 3월 고려총국 국내부를 탈퇴하고 김약수 등과 함께 비밀결사 까엔당(조선인민당)을 결성하였다. 당의 합법 사상단체로 건설사 결성에 참여하였다. 5월 김약수와 함께 북성회파를 대표하여 조선공산당창립대표회준비위원회(13인회)에 참가하였다. 8월 북성회 기관지 『척후대(斥候隊)』에 「신문의 사명」이란 글을 발표하였다. 9월에 조선기근구제회 창립에 참여하여 집행위원 및 조사부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1월 건설사를 확대 재편한 북풍회 결성에 참여하여, 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12월 북풍회 간부들과 함께 연명으로 한일 무산계급의 연대를 강화하자는 내용의 인쇄물을 일본 사회주의 단체에 발송하였다.
1925년 11월 ‘제1차 조선공산당 사건’과 관련하여 북풍파의 지도자인 김약수가 구속되자, 1926년 들어서는 만주로 활동의 근거지를 옮겼다. 지린〔吉林〕에서 무장단체 정통단(正統團)을 결성하여 단장이 되었다. 정의부(正義府)에 가담하여 기관지 『대동민보(大同民報)』,의 책임사원, 월간지 『전우(戰友』 책임편집 및 발행인으로 활동하였다.
1927년 7월 펑취안〔奉天〕에 있는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탈옥하였다. 1928년 2월 창춘〔長春〕 일본 영사관 경찰에 재차 체포되었다. 5월 다롄〔大連〕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월 형을 선고받고 1929년 9월 뤼순〔旅順〕형무소에서 만기 출옥하였다. 이후 펑취안에 거주하면서 국민부(國民府)에 참여하였고, 다롄에 회사 ‘신대륙사’를 세우고 경제활동을 하였다.
1936년 4월 『삼천리』에 「극동 문제를 싸고도는 열국 외상의 수완과 그 인물관」이라는 논설을 기고하였다. 1945년 9월 김약수 등과 함께 한국민주당 결성에 참여하고 조직부원이 되었다. 잡지 『국민시보(國民時報)』를 발행하였으며, 12월 『해방 전후의 조선 진상』을 발간하였다. 1948년 11월 대한식량공사 이사에 선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