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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2월 1일부터 이틀간에 걸쳐 정부수립문제를 논의한 비상정치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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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6년 2월 1일부터 이틀간에 걸쳐 정부수립문제를 논의한 비상정치회의.
내용

1945년 12월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 결정, 발표한 우리나라에 대한 신탁통치문제는 우리 민족에게 정치적으로 중대한 시련을 겪게 하였다.

당초 반탁에 찬성하던 좌익이 1946년 1월 3일 태도를 표변하여 신탁을 지지함에 따라서 좌우익의 분열은 노골화하였다. 이에 환국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 측에서는 같은 해 1월 4일에 김구(金九) 주석의 성명으로 귀국 후 최초의 당면비상대책을 천명하였다.

즉, 임시정부가 1945년 9월 충칭(重慶)에서 발표한 임시정부 당면정책 제6항에 따라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국내외 각계각층 대표를 소집, 비상정치회의를 열어 과도정권을 수립한 뒤에 다시 국민대표대회를 소집하여 헌법을 제정, 정식정부를 수립하자는 것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신탁통치를 사실상 배제하자는 것이었다.

임시정부는 비상정치회의 소집을 위하여 김약산(金若山, 일명 金元鳳)·김성숙(金星淑)·조소앙(趙素昻)·조완구(趙琬九)·장건상(張建相) 등 임시정부국무위원 5명을 대외교섭위원으로 선정하고, 좌우익 각 정당 및 각계 인사들과의 교섭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인민공화국측의 교섭대표 홍남표(洪南杓)는 임시정부 측이 군림적 태도로 통일에 대하여 무성의하다는 공격을 가하면서 비타협적인 태도를 보였다.

미소공동위원회의 개회를 앞두고, 각 정당간의 행동통일이라는 명분을 좌우 어느 쪽도 외면하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한국민주당·국민당·인민당·공산당 대표들은 여러 차례의 개별적 접촉을 가졌다.

그리고 1월 7일에는 민족통일 성취에 대한 기본방침을 토의한 결과 의견의 일치를 보게 되어, “모스크바삼상회의의 조선문제 결정에 대하여 조선의 자주독립을 보장하고 민주주의적 발전을 원조한다는 정신과 의도는 전면적으로 지지한다.

<국제연합헌장>에 의하여 의구(疑懼)되는 신탁제도는 장래 수립될 우리 정부로 하여금 자주독립의 정신에 기(基)하여 해결하게 함.”이라는 4당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다.

이 4당 회합은 1월 8일 신한민족당(新韓民族黨)을 참가시켜 5대 정당이 계속하여 민족통일 성취를 토의하였고, 1월 9일에는 신민당(新民黨)과 임시정부 요인을 참가하게 하여 민족통일에 대한 기본방침을 중심으로 토의를 거듭하였다.

그러나 이 회의에서는 공산당이 삼상회의결정의 전면적 지지를 고집하여 민족진영 대표들과 정면으로 맞서게 되었고, 5당 대표회의를 비상정치회의의 예비회담으로 결부하려고 하는 임시정부 측 주장이 비상정치회의를 부인하는 공산당의 주장과 대립하여 결국 결렬되었다.

이에 임시정부 측에서는 본래의 계획대로 임시정부 국무회의를 거쳐 조선공산당·인민당과 독립동맹을 제외한 18개 단체의 대표 각 1명씩과 임시정부 측 위원 3명이 옵서버(observer: 회의 등에서 정식 멤버로 인정되지 않으나, 특별히 출석이 허용된 사람으로, 발언은 할 수 있으나, 의결권이나 발의권은 없음)로 참석하여, 1월 20일부터 24일까지 5일간 비상정치회의의 제1차 주비회의(籌備會議)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서는 이승만(李承晩)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獨立促成中央協議會)와 비상정치회의를 합류시키기로 결정하고, 명칭을 ‘비상국민회의’로 바꾸어 이승만과 김구를 영수로 추대하였다.

임시정부 측 혁신계인 조선민족혁명당의 김약산·성주식(成周寔), 조선민족해방동맹의 김성숙 등 3명은 비상국민회의 탈퇴를 성명하였으며, 뒤이어 임시정부의 장건상도 임시정부와의 결별을 고하였다. 또한 공산당 산하단체도 모두 참가를 거부해왔으므로 비상국민회의는 우익진영만의 집결체가 되었다.

이렇게 이루어진 비상국민회의는 1946년 2월 1일 임시정부 측의 주도하에 서울 명동 성당에서 201명의 대표 중 167명이 참석하여 안재홍(安在鴻)의 사회로 개회하였다.

이날 대회는 임시정부에 대한 감사결의, 군정장관의 축사, 임시의장 김병로(金炳魯) 선출, 박윤진(朴允進)의 경과보고와 의사규정 조직대강의 채택에 이어, 권동진(權東鎭) 외 100명의 연서로 과도정부 수립 및 기타 긴급한 조처를 행하기 위하여 최고정무위원회를 설치하되, 인원수와 선정은 이승만·김구 두 사람에게 일임하는 건의안을 가결하였다.

이어 이극로(李克魯) 등 22명의 연서로 이 회의에 참가하지 않은 공산당·인민당·독립동맹 등 좌익계열 모든 단체의 참가권유안을 가결하여, 그 교섭위원으로 홍진(洪震)·최동오(崔東旿) 등 5명을 선출하였다.

또한 의장에 홍진, 부의장에 최동오를 추대하자는 고순흠(高舜欽)의 제의를 만장일치로 가결하였다. 조직대강 제4조에 규정된 위원선거는 안재홍 외 7명으로 구성되는 전형위원회에 일임하기로 하였다.

같은 달 2일에 개최된 회의에서는 의장 홍진의 사회로 대표 137명이 출석하여, 헌법·선거법 기초위원 선거에 들어가, 김병로 제안으로 이미 발표된 법제위원에게 대한민국임시헌장을 기준으로 수정, 제정하기로 하고, 현 위원 및 그 방면의 권위자 중에서 선출하도록 가결하였다.

기타 사항으로는 김규식(金奎植) 외 24명의 연서로 38도선 즉시철폐안을 제안, 가결하고, 예정된 결의안을 전부 채택한 다음 무기휴회로 들어갔다.

이때의 상임위원 명단은 정무위원장 안재홍, 재정위원장 조완구, 외교위원장 조소앙, 산업경제위원장 김성수(金性洙), 국방위원장 유동열(柳東說), 법제위원장 김병로, 교통위원장 백관수(白寬洙), 문교위원장 김관식(金觀植), 예산위원장 이운(李雲), 노동위원장 유림(柳林), 후생위원장 이학송(李鶴松), 선전위원장 엄항섭(嚴恒燮), 청원징계위원장 조경한(趙擎韓)이었다.

그리고 최고정무위원 28명은 임시정부 측의 이승만·김구·김규식·조소앙·조완구·김붕준(金朋濬), 신한민족당의 권동진·김여식(金麗植)·최익환(崔益煥), 한민당의 원세훈(元世勳)·백남훈(白南薰)·김도연(金度演)·백관수·김준연(金俊淵), 국민당의 안재홍·박용희(朴容羲)·이의식(李義植), 인민당의 여운형(呂運亨)·백상규(白象圭)·황진남(黃鎭南), 개신교의 함태영(咸台永), 천주교의 장면(張勉), 불교의 김법린(金法麟), 유교의 김창숙(金昌淑)·정인보(鄭寅普), 천도교의 오세창(吳世昌), 여성계의 황현숙(黃賢淑)·김선(金善) 등이었다.

그 뒤에 비상국민회의 최고정무위원회는 1946년 2월 14일 미군정사령관의 자문기관인 남조선대한국민대표 민주의원으로 개편됨으로써, 그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그 이름만 이어오던 중, 1947년 2월 14일부터 17일에 걸쳐 제2차 전국대의원총회를 개최하고 의장에 조소앙, 부의장에 유림을 추대하는 동시에 회의명칭을 ‘국민회의’로 변경하였다.

같은 해 5월 29일 중앙상임위원회는 다시 대한국민회로 명칭을 변경하는 등, 대내적인 내분이 겹쳐 자체모순으로 인하여 더 이상의 발전을 보지 못하였다.

참고문헌

『대한민국정당사』 1(중앙선거관리위원회, 1981)
『한국현대정치사』(송남헌, 성문각, 1981)
『한국현대정치사』(유병용 외, 집문당, 1997)
「1945~1946년 미국의 대한정책과 우익진영의 분화」(도진순, 『역사와현실 7호』, 한국역사연구회, 1992)
「1946년 전반 한국민주당의 재편과 우익정당 통합운동」(윤덕영, 『사학연구』 121, 한국사학회,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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