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통영 출신. 거제도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부산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하고, 1919년 무렵 북경(北京)으로 가서 북경대학(北京大學) 문과에서 수학했다. 1925년 1월 북경에서 결성된 혁명사(革命社)에 가입하고 잡지 『혁명』 발행에 참여했다.
1925년 8월 귀국해 조선일보사 정치부 기자로 근무하면서 안광천(安光泉)의 소개로 조선공산당에 입당했다. 1926년 3월 공산주의운동의 통일을 위해 ‘레닌주의동맹(Leninist League)’을 결성하는데 참여했다. 12월 조선공산당 제2차대회에서 중앙위원 후보로 선임되었고 고광수(高光洙)의 뒤를 이어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가 되었다.
1927년 1월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직은 사퇴했지만, 7월까지 조직을 지도했다. 8월 『조선일보』 해외특파원 자격으로 상해로 갔다. 10월에 귀국해 김준연(金俊淵)이 책임비서를 맡은 조선공산당에서 선전부원이 되었다. 11월 김준연 책임비서로부터 모든 사무와 후계당 조직 문제를 위임받고 김세연(金世淵) 책임비서를 선정했다.
1928년 2월의 제3차 조선공산당검거 때 상해로 망명하여 홍남표(洪南杓)가 책임비서였던 상해 야체이카의 위원이 되었다. 1928년 6월 코민테른 6차대회에 대표로 파견되어 10월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코민테른 동양부 앞으로 조선공산당의 보고서를 만들어 제출하고,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조선공산당 지부승인 취소결정을 번복해 줄 것을 촉구하는 글을 썼다.
1929년 4월 이른바 ‘ML당’(3차 조선공산당) 간부들과 블라디보스토크에 모여 당재건 방침을 협의했다. 상해 적색구원회(모플) 지부로 가서 운동자금을 마련할 것과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대한 선언서 발표 등의 임무를 띠고 상해로 갔다.
북경에서 ‘엠엘파’ 기관지 『계급투쟁』을 발행하고 여기에 철악(鐵岳), 광우(光宇), 일기자(一記者) 등의 이름으로 여러 글을 실었다. 1929년 5월 길림(吉林)에서 열린 조공재조직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30년 3월 상해에 도착한 고경흠(高景欽)과 함께 조선공산당 선전물의 근거지를 동경(東京)에 만드는 문제를 협의했다. 1931년 12월부터 1932년 8월 15일까지 동방노력자 공산대학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다.
1932년 모스크바에서 조선 관련 글을 써서 코민테른 간행물 『민족식민지문제 자료』에 실었다. 1934년 모스크바에서 외국출판사 한글 담당 직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