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 이래 남북만주 일대에서 분산적으로 활약하던 참의부(參議府)·정의부(正義府)·신민부(新民府)의 3부가 통합해 요령성(遼寧省) 신빈현(新賓縣) 흥경(興京)에 본부를 두고 조직되었다.
1928년 5월 정의부 소속 김동삼(金東三)이 중심이 되어 길장연로(吉長沿路) 서쪽 30리에 있는 신안둔(新安屯)에 집결, 3부의 통일을 위한 유일당을 형성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그리하여 그 해 11월 15일 정의부의 김동삼·지청천(池靑天) 계열과 신민부의 군정위원회측, 그리고 참의부의 김승학(金承學) 계열이 모여 혁신의회를 구성하였다.
이에 대해 신민부의 민정위원회측과 참의부의 심용준(沈龍俊) 계열, 정의부의 현익철(玄益哲)·고활신[高豁信, 일명: 고할신(高轄信)] 계열이 1929년 4월 군정위원회의 성격을 띤 국민부를 조직하였다. 혁신의회는 활동이 부진해 그 뒤 해체되었다. 국민부는 그 해 5월 중앙집행위원회를 구성하고 각 부서와 그 담당자를 설정하였다.
본부도 길림(吉林)에서 대둔(大屯) 지방의 흥경으로 이전하였다. 소속 독립군을 편성해 사령관에는 군사위원장 이웅(李雄)이 겸임하고 각 중대장을 선임하였다. 1929년 9월 20일 제1회 중앙위원회를 개최하여 선언문·강령·헌장 등을 채택한 뒤, 27일에 중앙집행위원회를 새로 개편하였다.
그 결과 국민부는 관할 지역의 자치행정만을 전담하고 독립운동사업은 민족유일당조직동맹이 수행하고, 국민부 소속 독립군은 조직동맹에 종속시키기로 하였다. 이 방침에 따라 국민부는 순수한 자치기관으로 재정비되었다.
그 해 12월 민족유일당조직동맹은 조선혁명당으로 강화되고, 독립군도 조선혁명군으로 개편되었다. 따라서, 국민부·조선혁명당·조선혁명군의 세 기관이 성립되었다. 이들 세 기관의 조직과 운영을 조선혁명당에서 주도함으로써 중국과 같은 이당통치체제(以黨統治體制)를 갖추게 되었다.
1931년 일본이 만주침략의 야욕을 실현하려는 수단으로 이른바 만보산사건(萬寶山事件)을 일으켜 한·중 두 민족을 이간시키고 있었다. 이 때 국민부는 이 사건이 일본의 간악한 음모에서 비롯된 것임을 천명해 사태를 수습하는 데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만주사변 뒤 일본이 만주 전역을 강점하자, 일부 지도급 인사들이 변절해 국민부를 이탈하였다. 또 사회주의자들이 내분을 일으킴으로써 혼란에 빠졌으나 곧 사태를 수습, 전열을 정비하였다.
1932년 조선혁명군과의 연석회의를 통해 한·중연합작전을 수립하고, 중국의 반만항일군(反滿抗日軍)인 중국의용군과 연합해 영릉가전투(永陵街戰鬪)·흥경성전투(興京城戰鬪)·노구대전투(老溝臺戰鬪)에서 대승하였다.
민사 활동에 국한되어 공보·교육, 농민의 권익옹호 운동이 주요 사업이었다. 공보 활동으로는 국민부의 기관지를 간행하고, 필요에 따라 각종 간행물을 발간해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교육 활동은 국민부가 가장 주력하였던 사업이다. 촌(村)에는 서당을, 구(區)에는 소학교를, 지방에는 중등학교를 설립해 인재를 양성하였다. 대표적 교육기관으로는 화흥중학교(化興中學校)와 동명중학교(東明中學校)가 있었다. 교육사업에서 긴요한 것은 우수한 교사의 확보라고 생각하여 왕청문(汪淸門)에 부설사범학교를 설립, 교사를 양성하였다.
국민부의 사업 가운데 농민 운동은 중국 관청의 부당한 행정처분과 여러 가지 제한 조처, 그리고 중국인 지주들의 횡포와 착취로부터 농민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중국인과 한국인 사이를 이간시키려는 일본의 모략을 저지해 한국과 중국간의 유대를 강화시키는 일이었다.
국민부의 활동을 지원하던 조선혁명군과 조선혁명당이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간의 내분으로 세력이 약화되었고, 또 지도급 인사들이 차례로 전사함에 따라 자연히 해체되었다. 그러나 국민부의 계몽운동의 결과 수백 명의 독립군이 배출되어 이후 독립운동을 주도하였다. 1930년 4월 기관지로 『조선혁명』을 창간하였고, 부립(府立) 남만학원(南滿學院)에서 『봉화(烽火)』를 간행하여 정치와 사상의 계몽을 주도하였다.
한편 성립 초기의 내부갈등이나 사회주의 세력에 대한 탄압, 통치식 단체의 형식을 띠면서 민중에게 부담을 주는 등 일정한 한계와 문제점도 지적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