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 1월 25일 동경유학생 및 노동자사회의 지도와 원조를 목적으로 이기동(李起東)·한윤동(韓潤東)·홍승로(洪承魯)·유진걸(柳辰杰)·김낙준(金洛俊, 金燦)·김약수(金若水)·박렬(朴烈)·정태성(鄭泰成)·송봉우(宋奉瑀)·박일병(朴一秉)·김사국(金思國)·백무(白武) 등이 동경조선고학생동우회(東京朝鮮苦學生同友會)를 만들었다.
이들 중 박렬·정태성·백무·김약수 등과 사상단체 신인연맹(新人聯盟)의 조직을 준비하던 원종린(元鍾麟)·임택룡(林澤龍)·권희국(權熙國)·김판권(金判權) 등 20여 명이 1921년 11월 21일 이 단체를 결성하고 기관지 『흑도(黑濤)』를 발간하였다.
취지는 한국의 현실을 양심적인 일본인에게 전달하는 것, 국가적 편견과 민족적 증오가 없는 세계융합을 실현하는 것 등이다. 1922년 7월 시나노가와수력발전소(信濃川水力發電所)에서의 조선노동자 학살사건에 대한 조사 및 항의운동 등에 일정 구실을 하였다.
그러나 박렬·정태성·백무·김약수 등은 무정부주의자인 오스기[大杉英]·이와사[岩佐作太郎] 등의 지도하에 있었고, 원종린 등은 사회공산주의자인 사카이(堺利彦)의 영향하에 있었기 때문에 갈등이 고조되며 양분되어 흑도회는 1922년 10월경 사실상 해체되었다. 박렬·김중한·이윤희(李允熙) 등은 풍뢰회[風雷會: 1922년 10월 결성. 흑우회(黑友會)로 개명]를, 김약수·김종범(金鍾範)·안광천(安光泉) 등은 북성회(北星會, 1922년 12월 26일경 결성)를 조직함으로써 이 단체는 해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