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북도 경원 출신. 일찍이 노령(露領)으로 망명하여 노서아학교(露西亞學校)를 졸업하였으며 러시아어에 능통하였다. 1910년 이후 이상설(李相卨)·유인석(柳麟錫) 등과 항일 구국 운동을 전개하였고, 1918년 6월 니콜리스크-우수리스크시에서 개최된 제2회 전로한족대표자회의에서 전로한족중앙총회(全露韓族中央總會)를 발족하였고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19년 2월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고, 국내에서 파견된 여운형(呂運亨)과 접촉하며, 독립운동의 방략에 대해 많은 논의를 나누기도 하였다. 그리고 1919년 3·1운동에 즈음하여 한족중앙총회를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로 개편하고, 시베리아·간도 지방 독립운동의 총지휘기관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 해 3월 15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위 운동을 전개하려고 계획하였으나 러시아 당국에 의해 저지되자, 3월 17일 러시아 당국에 아무런 통고 없이 전격적으로 시위 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5월 한명서(韓明瑞)·김하석(金河錫)·남만춘(南滿春)·김철훈(金哲勳)·김만겸(金萬謙) 등과 함께 고려공산당을 조직하였다. 또한, 원세훈(元世勳) 등을 상해(上海)로 파견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절충을 벌이기도 하였다.
1919년 4월 상해에서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는 재로한인사회(在露韓人社會)의 대표로 교통총장에 추대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같은 해 5월 3일 동생 문창락(文昌洛)에게 노령과 만주에서 활동하는 독립 운동자를 동원하여 항일 무력전을 감행하도록 하고, 노령에 군관학교(軍官學校)를 창설하였다.
1921년 3월 1일 만주에 있는 각급 독립군 유격대를 편성하여 항일 무력전의 전개와 국내의 애국 지사를 규합하여 독립운동의 기세를 높이기도 하였다. 일설에는 1934년 8월 5일 상해에서 밀정에 의하여 해를 입었다고 하지만 자세한 것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1990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