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속을 정화한다는 목표하에 공창 폐지(公娼廢止) 등을 결의하고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1923년 12월 21일 서울 종로 중앙예배당(中央禮拜堂)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하고 강연회에 이어 참석한 400여 명의 여론에 따라 결성되었다.
1924년 1월 24일 중앙예배당에서 개최된 강연회에서 오화영(吳華英)이 「풍기개선(風紀改善)에 대하여」, 홍성하(洪性夏)가 「공사창(公私娼)의 사회학적 고찰」이란 제목으로 강연을 함으로써 이 단체의 활동 방향을 제시하였다.
같은 해 2월 6일 계명구락부(啓明俱樂部)에서 개최된 회의에서는, 남녀 학생들에 대한 풍속을 정화하기로 방침을 세우고, 여학생들에게 교복을 입게 하도록 각급 여학교에 요청하였다. 또한 조사위원제도를 두어 학생들의 억울한 사정을 해결하고 풍기를 규찰하기도 하였다.
1924년 11월 26일 본부를 인사동에서 북미창정(北米倉町)으로 옮기고 강령과 선언문을 발표한 뒤, 28일에는 다시 임원을 뽑고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이 때 조봉암(曺奉岩)·김한경(金漢卿)·김석연(金石然)·김약천(金若天)·주병서(朱炳瑞)·권태휘(權泰彙) 등이 임원으로 뽑혔다.
결의안은 첫째, 우리 무산계급전(無産階級戰)의 진영을 어지럽히는 자는 개인이나 단체를 막론하고 엄격히 제재할 일, 둘째 본단의 정신을 발휘하기 위해 각지에 선전대(宣傳隊)를 파송할 일, 셋째 무산계급문화를 향상시키기 위하여 연구회 및 강연회를 수시 개최할 일 등의 내용으로 되어 있다.
결의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활동 방향이 점차 사회주의적인 경향을 띠게 되었다. 1925년 8월부터 전국 순회강연을 시작하였는데, 경기도를 선두로 충청도·경상도를 거치면서 호응이 예상외로 커지자 일본 경찰이 엄중한 감시와 강연 중지 등으로 순회강연을 방해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경상북도 영양에서 열기로 예정된 강연회는, 경상북도경찰국의 ‘본도에서는 엄중히 금지한다’는 방침에 의해 금지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