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도 금천 출신. 1917년 서울 광희문교회(光熙門敎會)·수표교회(水標敎會) 목사를 역임하였다.
1919년 3·1운동 당시 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징역 6월형을 선고받고 서대문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1년 3월 1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공소를 기각하였다.
그 해 10월 철원에서 김상덕(金相德)·신현구(申鉉九)·조종대(趙鍾大) 등과 애국단(愛國團) 철원군단(鐵原軍團)을 조직하고 이근옥(李根玉) 등 청년들을 모집하여 상해 임시정부에 파견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다가 1920년 3월에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 해 1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정치범죄처벌령·보안법 및 출판법위반 등의 죄목으로 징역 1년 6개월을 언도받고 복역하였다.
1922년 출옥 후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집단거주지인 신한촌(新韓村) 선교사를 자원하여 그곳에서 전도사업을 펼쳤다.
1929년 소련공산당에 체포되어 10년의 중노동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사망하였다.
1963년에 대통령표창, 1977년에 건국포장, 1990년에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