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북도 회령 출신. 1910년 국권을 일본에 의해 빼앗기자 북만주 길림성 화룡현(吉林省和龍縣)으로 망명하여, 단군의 건국이념과 배일사상을 가르칠 목적으로 학성학교(學成學校)를 설립하고 교장으로 재직하였다.
1919년 국내에서 3·1운동이 전개되자, 그해 4월 화룡현 송언평(松堰坪)에서 3,000여 명의 동포를 동원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그해 8월에는 간도 왕청현(汪淸縣)에 있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에서 재무 및 검사국장과 군정회의원으로 활약하였다.
1920년 청산리대첩 이후에는 군자금 모집을 위해 회령·무산·경성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그해 음력 9월 19일 일본군이 만주에 출병하여 독립군을 추격하자, 김덕현은 송언평 고형동(高炯洞)에서 단신으로 일본군과 대적하다가 전사하였다.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