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응해는 1878년 함경남도 함주군 상기천면 오노동에서 출생하였으며, 국내에서 의병에 가담하였다가 국권피탈(國權被奪) 후 서간도로 망명하였다.
1919년 남만주에서 결성된 항일 독립단체인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대한독립단은 국내에서 의병운동을 전개하던 박장호(朴長浩) 등이 대한제국의 회복을 목표로 설립한 복벽주의(復辟主義) 계열의 독립단체였다. 1920~1921년 대한독립단 단장으로서 중국 및 평안북도 초산 · 강계 등지에서 독립운동 자금 모집 활동을 지휘하였다.
1921년 음력 4월 서간도 방면 독립운동 단체를 통일하기 위한 조직에서 남로(南路)를 담당하는 참장(參將)에 선임되었다. 같은 해 11월 대한독립단이 복벽주의자와 임시정부 찬동자로 갈려 분리될 때 박장호 등 복벽주의자들과 함께 대한독립단을 떠나 기원독립단(紀元獨立團)을 설립하고 단장에 올라 활동하였다. 1922년 3월 밀정 유기명(柳冀明)을 처단하는 활동을 지휘하였다.
1922년 4월 지린성〔吉林省〕 액목현(額穆縣)에서 조직된 통일군단(統一軍團)의 정무부장에 선임되었으며, 같은 달 조선 내의 일제 관공서 파괴 및 대관(大官) 암살 활동을 지휘하였다. 상하이에서 열릴 예정인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를 후원하기 위해 1922년 8월 단체를 조직하여 활동하였고, 같은 해 10월 대한독립단 총장 자격으로 국민대표회의의 준비와 개최에 관여하였다.
1922년 남만주에서 활동하던 항일 독립단체들이 효과적인 독립 투쟁을 전개하기 위해서 통일운동을 벌였다. 그 결과 1922년 8월 23일 펑톈성〔奉天省〕 환인현 마권자(馬圈子)에서 서로군정서, 대한독립단, 대한광복군영, 대한정의군영, 대한 광복군총영 등 17개 단체 대표 71명이 모여 남만한족통일회의(南滿韓族統一會議)를 개최하고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를 결성하였다.
남만한족통일회의 대표들은 각 독립단체의 명의를 모두 취소하고 대한통의부로 단일화하고, 군대의 명칭을 대한통의부 의용군으로 부르기로 하고, 9장 63조의 헌장을 제정하였다. 이때 대한통의부의 총장에는 김동삼(金東三)이 선출되었고, 부총장은 채상덕(蔡相悳)이 맡았다. 대한독립단 출신의 이웅해는 민사부장을, 이병기는 재무부장을 맡았다. 1924년 1월 이웅해는 대한통의부 중앙위원에 선임되어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았다.
201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