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거창 출신이다.
1907년 2월 일본에서 한국독립 청원 활동을 벌이고 돌아온 전직 관료 나인영(羅寅永)과 오기호(吳基鎬)가 나라를 팔아먹는 데 앞장선 을사오적(乙巳五賊)을 비롯한 친일 대신들의 처단을 결의하였다.
이들은 장사들을 모집하여 4인 1조의 결사대를 조직하고, 을사오적과 법부대신(法部大臣)을 격살(擊殺)하기로 하였다. 1907년 3월 25일 서울의 광화문과 돈의문, 합동(蛤洞), 사동(寺洞) 등지에서 거사를 일으켰으나 여의치 못하였다.
윤충하(尹忠夏)는 전 사례소(史禮所) 부원(副員) 김인식(金寅植)을 통해 나인영의 계획을 듣고 을사오적 처단 거사에 가담하였다. 그는 “재물도 모자라고 기운도 약하여 거사에 직접 도움이 되지는 못하지만, 거사가 성공한 후에는 동지들과 함께 자수하여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하겠다.”는 각오를 품고 있었다.
거사 실패 후 체포되어 투옥 중 수차 고문을 당하고 심문을 받았으나, 정신을 잃어가면서도 끝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1907년 7월 3일 평리원 재판에서 10년 유형(流刑)을 선고받았다.
1919년 2월 거창의 곽종석(郭鍾錫)을 방문하고 파리강화회의 개최 사실과 서울 유림들의 독립활동 양상을 상세히 보고하였다. 이어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여 국제 여론에 호소하는 것이 독립을 달성하는 지름길임을 역설하며, 독립청원서 제출 대표로 나서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 후 곽종석의 조카 곽윤(郭奫), 제자 김황(金榥) 등과 함께 상경하여 김창숙(金昌淑)을 만나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할 장서(長書)를 작성할 때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922년 9월 한국 인민들이 미국 워싱턴에서 열리는 워싱턴군축회의에 보내는 청원서에 태극교(太極敎) 대표로서 참여하였다. 그 청원서는 일본의 한국 병합을 부인하고 한국 문제의 해결 없이는 세계 평화가 있을 수 없음을 강조하며,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한국의 정부로 승인해 줄 것, 태평양회의[워싱턴군축회의]에 파견된 한국위원에게 출석권을 제공할 것, 열국(列國)이 일본의 무력정책을 방지하여 세계 평화와 한국독립을 달성토록 해 줄 것 등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