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손암(巽菴). 전라남도 강진 출신.
1905년 초에 국권수호를 열강에 호소하기 위해, 나인영(羅寅永)·이기(李沂) 등과 함께 포츠머드강화회의에 참석하고자 미국에 가려 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방해공작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그 해 6월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정계의 거물들인 이토[伊藤博文]·오쿠마[大隅重臣]·모치즈키[望月龍太郎] 등을 차례로 만나 동양평화를 위해 한국·중국·일본 3국이 회맹(會盟)할 것과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보장할 것을 역설한 뒤, 동경에 머물며 일본정계의 추이를 지켜보았다.
그러나 그 해 11월 이토가 특명전권대사로 한국에 건너가 외교권을 박탈할 것이라는 보도가 나오자, 나인영과 연명으로 이토와 메이지(明治) 일왕에게 각각 장문의 글을 보내 이를 저지하려고 하였다. 이어 외무대신 박제순(朴齊純)에게 급전을 보내 조약이 강제 체결되는 것을 막으려 하였지만, 이것 역시 실패되어 을사오조약은 끝내 강제 체결되고 말았다.
이에 12월 나인영과 함께 박제순·이완용(李完用)·권중현(權重顯)·이근택(李根澤)·이지용(李址鎔) 등 을사오적을 처단할 결심을 굳히고 보검 두 자루를 구입한 뒤 귀국하였다. 귀국 후 김동필(金東弼)·김인식(金寅植)·이용태(李容泰) 등의 협조를 얻어 총기를 구입하고 장정들을 모집하면서 은밀히 오적암살계획을 세웠다.
그래서 1906년 3월 18일 나인영과 함께 용사들을 거느리고 오적암살을 시도하였으나 불행히도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거사 실패 후에도 나인영과 함께 김인식·서창보(徐彰輔)·이홍래(李鴻來) 등의 후원에 힘입어 오적암살을 다시 모의하던 중, 거사계획이 탄로되면서 동지들이 검거되기에 이르렀다.
이 때 김인식·나인영과 함께 4월 12일 자현장(自現狀)을 가지고 평리원(平理院)에 자진 출두하였다. 이로 인해 5년 유배형을 선고받고 지도(智島)로 귀양갔다. 그 뒤 나인영과 함께 민족종교인 대종교를 창도하여 민족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