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본부를 서울에 두었으나 그 뒤 곧 소멸하고, 함경북도에 설치된 성진지부·길주군지부·함경북도총지부와 함경남도의 단천지부만 교세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길주군지부와 함경북도총지부는 1932년 길주교화원으로 병합되면서 소멸되고, 성진지부 하나만 남게 되었다. 공자를 숭배하고 유교정신을 이어받아 도법예의(道法禮儀) 생활의 실천을 교지로 하였다.
입교자(入敎者)는 봄·가을에 열리는 공자제(孔子祭)에 참석하여야 하며, 이때 개최되는 강회(講會)에서 한문실력을 시험하여 성적이 우수한 자는 교단 임원인 유사(有司) 또는 도유사(都有司)로 임명된다.
1년마다 열리는 임원선거총회에서는 교단 발전에 공이 있거나 덕망이 있는 사람을 뽑아 교장(敎長)·장의(掌議)·도유사·교감(敎監) 등에 임명한다. 많은 사람들이 입교하였는데, 그 이유는 유생·양반의 지위를 획득하여 상층계급이 된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성진지부의 경우 1908년 4월 성진읍에 사무소를 개설한 지 얼마 안되어 2,000여 명이 입교하였으며, 길주지부에서도 1910년 4월 길성면 지부설립과 동시에 1,800여 명이 입교하였다. 당시 입교자가 임원이 되려면 2원에서 5원의 의연금을 납부하고 피로연 음식비도 많이 내야 하였으나, 서로 경쟁하며 다액의 기부금을 납부하였다.
원래의 취지와는 달리 폐해가 나타나게 되자 일제 당국이 조정에 나서게 됨으로써 교세가 침체되었다. 1934년 당시 포교소 두 곳과 2,275명의 신도가 있었는데 신도는 전부 남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