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개성부(開城府) 출신으로, 출생 연도는 미상[1874년으로 추정]이고, 농업에 종사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 체결 후, 애국지사들은 조약문에 조인한 이근택(李根澤), 이완용(李完用) 등 5명을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은 을사오적(乙巳五賊)이라고 부르며 이들을 처단하려 하였다.
전 궁내부 물품사(物品司) 주사(主事) 김석항(金錫恒)이 기산도(奇山度), 이종대(李鍾大), 김일제(金一濟), 박경하(朴敬夏) 등의 애국지사들을 규합하여 거사를 벌이려 하였는데, 손성원(孫聖元)은 여기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을사오적 처단 활동 당시 김석항은 거사 기획과 재무 담당 및 총괄자 역할을, 기산도는 행동대장의 역할을 맡았다. 기산도는 결사대 동지들과 함께 1905년 11월 23일 밤 오적의 한 사람인 군부대신(軍部大臣) 이근택의 부친 이민승(李敏承) 처단 활동을 벌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어 기산도는 1906년 2월 16일 밤 이범석(李範錫), 이근철(李根喆) 등과 함께 이근택의 침실에 돌입하여 그를 처단하려 하였으나 상반신을 칼로 난자하여 중상을 입히는 데 그쳤다.
김석항, 기산도 등이 오적 처단 활동을 벌이는 과정에서 손성원은 이들의 지시를 받아가며 이태화(李太和), 박용종(朴龍鍾), 김필현(金必鉉) 등과 함께 오적의 동정을 감시하는 역할을 맡았다. 오적 처단 활동이 실패로 돌아간 후, 김석항 · 기산도 등 10명의 동지들과 함께 1905년 11월 28일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감옥에서 혹독한 심문과 고문을 당한 후, 1906년 5월 13일 평리원 재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에 1906년 7월 30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2016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