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보(金致寶)는 1895년 9월 17일 평안남도 평양에서 태어났다. 김성준(金聖俊) · 김치보(金致甫, 金治寶) 등의 이명을 사용하였다.
김치보는 1908년경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하여 한민회(韓民會)에 참여하고, 청년회 조직에 앞장섰다. 이듬해 미주 국민회(國民會) 블라디보스토크 지회 회원으로서, 같은 해 4월에는 청년돈의회(靑年敦義會)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일하였다.
1910년 일제의 강제 병합을 규탄하는 성명회(聲明會) 선언서에 서명하였다. 성명회는 1910년 8월 23일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한 시베리아 지방의 한인들이 블라디보스토크 개척리 한인학교에서 조직하여 “대한의 국민 된 사람은 대한의 광복을 죽기로 맹세하고 성취한다.”라는 종지(宗旨)를 내외에 알리고자 하였다.
1910년 12월 28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직된 자선공제회(慈善共濟會)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11년에는 권업회(勸業會) 통신부장으로 활동하였다. 권업회는 한인들이 러시아 당국의 공식 인가를 받고 조직한 최초의 한인 단체로서, 1911~1914년까지 4년 동안 연해주 흑룡주 지역의 대표적인 재러 한인의 권익 옹호 기관이자 독립운동 단체로서 활동하였다. 권업회는 『 권업신문(勸業新聞)』의 간행, 교육 진흥 활동, 한인의 자치활동, 토지 조차(租借)와 귀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권업회가 해산된 후 『 한인신보(韓人新報)』 발기회 고문단장으로 활동하였다. 『한인신보』는 『권업신문』의 후신으로, 민족의식 고취에 기여한 신문이었다.
1919년 3월 26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노인단(老人團)의 발대식이 있었다. 이들은 이날 밤 김치보의 집에서 창단식을 갖고 단장으로 김치보가 선임되었다. 노인단은 대표자 6명을 선정하여 조선총독부에 파견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또 단원 중에서 결사대를 모집하여 국내로 들여보내거나 단원 150명을 국내로 파견하여 3 · 1운동을 확산시킬 계획도 세웠다. 그리하여 1919년 강우규(姜宇奎) 의사를 서울에 파견하였다.
1920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거행된 3 · 1절 축하 기념식에서는 재무부장으로서 한인들의 민족의식 고취에 기여하였다. 즉, 1920년 1월 31일 연해주에서는 러시아 연해주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며, 이 정부는 한인 독립운동에 대하여 우호적인 입장을 보였고, 이에 한인 독립운동은 다시 활기를 띄게 되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1920년 2월 23일 오후 1시 신한촌(新韓村)의 유지 인사들은 각 단체 대표자회를 개최, 협의한 결과 2월 27일부로 대한국민의회 의장 서리 한창해(韓蒼海)와 서기 대리 전일(全一)의 명의로 통지서를 각 지방에 발송하여 각 지방이 모두 같은 날 같은 시각에 3 · 1독립선언기념회를 갖기로 하였다. 그리고 이 계획을 추진하기 위하여 재무부장에 김치보가 선출되었다.
이후 김치보는 1920년 4월 신한촌 참변( 사월참변) 이후 무기 수집, 애국청년 군사훈련 등을 전개하다가 일제에 체포되었으나 탈출하여 만주 훈춘〔琿春〕에서 살다가 1941년 11월 18일 순국한 것으로 전해진다.
1996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