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白南俊)은 1885년 평안북도 운산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백우광(白愚狂) · 백신일(白信一) · 백형옥(白亨玉) 등을 사용하였다.
1912년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총독 암살 미수 사건으로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19년 3월 중국 지린성〔吉林省〕 류허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에서 한인공회(韓人共會)를 설립하였으며, 1920년 3월 관뎬현〔寬甸縣〕에서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에 입단하여 1922년 8월 군사부장(軍事部長)에 임명되었다.
1921년 5월 상하이〔上海〕에서 박은식(朴殷植)과 함께 국민대표회기성회(國民代表會期成會) 위원에 임명되었고, 같은 해 8월 환런현〔桓仁縣〕에서 개최된 남만한족통일회(南滿韓族統一會)에 참석한 뒤 9월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설립을 위해 노력하였다.
1922년 1월 대한광복군총영의 대표로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민족대회(極東民族大會)에 참석하였고, 1923년 3월 상하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 통의부 대표로 참석하여 서간도(西間島)의 상황과 통의부의 취지 및 목적과 계획 등을 설명하였다. 같은 해 7월 임시정부 임시헌법 개정기초위원회(改定起草委員會) 기초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924년 9월경 대한통의부 민선대표(民選代表)로 전만통일회의(全滿統一會議)에 참석한 뒤 11월 지린성 화전현(樺田縣)에서 정의부(正義府)를 설립하였다. 1926년에는 정의부 검판부(檢判部) 검판장(檢判長)으로, 1927년 7월에는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였다.
1932년경 지린영사관 경찰에게 체포되어 신의주경찰서로 압송되었으며, 1933년 2월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治安維持法) 위반으로 징역 5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2014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