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철(朴昌鐵)은 1900년 6월 평안북도 의주군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박유빈(朴有彬) · 박응서(朴應瑞) 등이 있다.
박창철은 중국 광둥군관학교〔廣東軍官學校〕를 졸업한 뒤, 1920년대 중반 참의부(參議府)에 가입하여 제2중대 부사(副士)로 활동하다가 공로를 인정받아 소대장으로 승진하였다. 1929년 7월 만주 환런현〔桓仁縣〕 상피구(爽皮溝)에서 보안대장 김병식(金炳植)과 함께 북만(北滿) 각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중국 관헌에게 체포되어 1930년 12월 23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살인 ·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신의주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1933년 6월 7일 출감하였다.
출감 후 다시 환런현으로 가서 잡화상을 운영하다가 1935년 국민부 소속 군대인 조선혁명군(朝鮮革命郡)에 가입하여 제1소대장으로 취임하여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조선혁명군 총사령관 김호석(金浩石)의 호위가 된 이후에는 지린성〔吉林省〕 지안현〔輯安縣〕, 랴오닝성〔遼寧省〕 관뎬현〔寬甸縣〕 일대에서 군자금을 조달하였고, 1935년 8월 하순에는 평안북도 위원군(渭原郡) 서대면에서 군자금을 조달하였다.
1936년 8월에는 위원군 신천(新川) 대안(對岸)인 지안현 임강(臨江)에서 30여 명의 대원과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일본 순사들과 교전하였다. 이후에도 대원 김홍주(金弘冑) · 김태영(金太泳) · 이영진(李永珍) · 최여선(崔呂善) · 김시용(金時湧) · 김태묵(金泰黙) · 홍석태(洪錫泰) · 최승익(崔承益) 등과 함께 만주 일대에서 함께 활동하였으며, 1937년 봄 이들과 함께 국내로 잠입하여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1938년 2월 28일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방화 · 공갈 · 강도 · 약취(略取) 등의 죄목으로 징역 15년 형을 선고받고 공소하여 같은 해 3월 18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징역 12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수감 중이던 1939년 7월 옥중에서 일본인 간수가 조선인 수감자를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에 항의하며 투쟁을 주도하다가 1941년 8월 2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요죄로 징역 1년 형이 추가되어 옥고를 치렀다.
201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