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2월 18일에는 중국 지린성〔吉林省〕 옌지현〔延吉縣〕 국자가(局子街) 하장리(下場里)의 박동원〔朴東轅, 연길도윤공서외교과원(延吉道尹公署外交科員)〕 집에서 구춘선(具春先) · 김영학(金永學) · 유예균(劉禮均) 등 33인과 함께 광복단(光復團)을 조직하고 비밀회의를 열었다. 그리하여 간도 지방의 모든 교회와 단체는 독립선언서가 발표되는 대로 ‘독립만세’를 절규하기로 결의함으로써 같은 해 용정(龍井)에서 3 · 13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같은 해 4월에는 간도에서 조직된 조선독립기성총회장(朝鮮獨立期成總會長)의 지시에 따라 고덕승(高德勝) · 이상호(李相鎬) · 지송(池松) 등과 함께 인근 지역 사방으로 파견되어 독립만세운동으로 인해 일제 경찰에 붙잡힌 결원을 보충하기 위하여 활동하다가 노령(露領)에서 개최된 신국민대회(新國民大會)에 서일(徐一) · 구춘선 · 서왈보(徐曰輔) 등과 함께 참가하였다. 이 시기에 또 옌지현 명월구(明月溝)에 의군부(義軍府)가 조직되자 여기에 참가하여 본부 총재에 이범윤(李範允), 총사령에 김현규(金鉉圭), 참모장에 진학신(秦學新) 등으로 배치될 때 중부(中部) 의군부 참모장으로 임명되어 실제 중심 세력으로 5개 대대를 보유하였다.
1920년 8월 하순에는 중국 토군(土軍)이 일제에 매수당해 내습한다는 정보를 접하고 150명으로 감사대(敢死隊)를 조직, 노야령(老爺嶺)에서 전투를 벌여 중국 토군을 격퇴하고 일본군에게는 큰 타격을 가하였다. 그 뒤 청산리 대첩을 거두고 난 다음 밀산(密山)을 경유하여 노령으로 들어가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군(軍)과 함께 러시아에 갔으나, 1921년 6월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이 일어나자 원래의 활동 근거지인 옌지로 되돌아와 의군부 재기를 위하여 활동하였다.
한편, 1920년 1월에는 옌지현 춘양향(春陽鄕) 합마당(蛤蟆塘)에 자리한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군정사군무서(軍政司軍務署) 독판(督辦) 서일(徐一) 휘하에서 김덕현(金德賢) · 손범철(孫範哲) 등과 함께 군정회의원(軍政會議員)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23년 5월에는 옌지현 명월구(明月溝)에서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을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김규식(金奎植)을 추대하고, 고평은 참모장에 임명되었으며, 당시 병력 규모는 4백여 명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군사훈련과 조직을 강화하고 국민개병제(國民皆兵制)로 병농일치(兵農一致)의 둔전제(屯田制)를 택하는 한편, 노령으로부터 무기를 구입해 오는 등 군세를 확충하였으나, 실제 항전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1928년 재만동지회(在滿同志會)를 조직하여 이주 한인의 생활 정착에 힘쓰다가 중국 관내(關內)로 이동하였다.
199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