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북도 경성 출신. 1910년 국권을 강탈당하자 간도 용정촌(龍井村)으로 이주, 전재일(全在一)·윤태선(尹台善) 등 10여 명과 함께 손가락을 자르는 의식을 치르면서 조국 광복운동에 헌신할 것을 맹세하였다. 그 뒤 결사구국단(決死救國團)을 조직하여 고향을 내왕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는 향리에서 독립만세시위운동에 주도적으로 관여하다가 상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가담, 활동하였다.
여기서 내무총장 안창호(安昌浩)로부터 함경북도 연통제의 총감(總監)으로 임명받고 귀국, 함경북도 내 10여 개 군을 상대로 비밀리에 연통제 군조직을 완료하였다.
이후 상해임시정부와 함경북도 경성군을 내왕하면서 군·면단위 조직을 완료하고 기밀 문서의 수발, 군자금의 모금 전달, 밀정 파악 보고, 일제 기관의 소재 파악, 헌병·경찰 배치 상황, 독립운동기관 설치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다.
1920년 10월 향리에서 연통제 조직을 통해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미행하던 일본 경찰에 잡혔다. 1920년 말 함흥지방법원 청진지청에서 징역 4년형을 선고받고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옥중에서도 독립만세를 선도, 독립지사들을 격려, 고무하다 요주의 인물로 지목되어 혹독한 고문에 인사불성이 되기도 하였다.
출옥한 1924년부터 1930년까지 일제의 감시 대상이던 동흥중학교(東興中學校)를 육성, 발전시키는 데 노력하다가 옥고의 후유증으로 죽었다.
1977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