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군부 ()

근대사
단체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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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19년 만주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
개설

종래 국내에서 활동하던 의병들이 동북 만주 각지에 산재해 있다가 1919년 3·1운동에 자극을 받아 연길현 명월구(明月溝)에서 이범윤(李範允)·진학신(秦學新)·최우익(崔友翼)·김청봉(金淸鳳)·김현규(金鉉圭) 등이 주동이 되어 그해 4월 조직하였다.

조직구성

조직은 본부와 중부로 나뉘었고, 활동지를 화룡(和龍)·왕청(汪淸)·혼춘(琿春) 등지로 확대시켰으며, 자금은 교민들의 의연금으로 충당하였다.

조직의 간부는 본부 총재에 이범윤, 총사령 김현규, 참모장 진학신, 총무부장 최우익, 군사부장 김청봉, 외교부장 신립(申立), 통신부장 지우강(池雨江)이었고, 중부 참모장 고평(高平), 서무부장 이을(李乙), 재무부장 김종헌(金鍾憲), 외교부장 김종환(金鍾煥), 통신부장 박재(朴在), 군법원장 허승완(許承完), 헌병대장 최상운(崔尙雲), 군기감독 강문주(姜文周)였다.

의군부의 이와 같은 이원적 조직은 중앙 통제를 약화시켜 각지 의군부의 분산된 독립군부대를 개별적으로 활동하게 하였다. 중부의군부는 ‘조선독립군’으로 활동하였으며, 의군부 소속 허근(許根)·강창대(姜昌大)·박재눌(朴載訥)·강영찬(姜永讚) 등은 ‘구국단(救國團)’이라는 독립군단체를 조직하였다.

기능과 역할

1년 2개월 만에 6개 대대로 증강, 1919년 7월 항일투쟁과 반동세력의 분쇄를 위해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와 동맹해 효과적인 작전을 개시하였다. 1920년 6월 국경수비대와 헌병을 격퇴시키고 한국인 순사 및 헌병보·밀정들을 위압해 간도 용정 국자가(間島龍井局子街)와 두만강 대안 각지의 친일배들을 크게 위축시켰다. 그러나 이들은 일제군경의 공격과 동북군벌(東北軍閥)의 내습으로 크게 제약을 받아 주로 야간공작에 치중하였다.

1920년 8월 일본경찰의 교사를 받은 중국군의 공격으로 고평 지휘의 감사대(敢死隊) 150여 명이 불가피하게 전투를 벌여 쌍방 모두 큰 손실을 당하였다. 이에 의군부본부는 최우익의 3개 중대를 출동시켜 고평의 군대와 합동해 큰 전과를 올렸으나, 최우익·이을·강도천(姜道天) 등 13명의 희생자를 내었다.

그 뒤 의군부는 서로 독립적으로 군사행동을 했던 본부와 중부가 합동해 내부를 강화시켜 북로군정서의 청산리대첩(靑山里大捷) 당시 어랑촌전투(漁郎村戰鬪)에 참가했고, 두도구(頭道溝) 일대에서는 군자금을 모집하기도 하였다.

청산리대첩 후 일본군의 토벌작전을 피하면서 서일·홍범도 등이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할 때 의군부도 가맹해 1921년에 흑룡강(黑龍江)을 넘어 노령으로 갔다.

거기에서 자유시참변(自由市慘變)을 겪고, 시베리아에 근거지를 둔 한국인 무장부대가 모두 소련에 의해 강제로 무장해제를 당하자 연해주(沿海州) 지방에서의 항일독립투쟁은 어려워졌다.

그 뒤 여러 차례의 군사연합회의를 거쳐 1924년이범윤이 회장에 추대되고 김좌진·최진동(崔振東)·조성환(曺成煥)·나중소(羅仲昭)·김규식(金奎植) 등이 위원이 되어 다시 독립군단을 조직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한편, 1923년 2월경 통의부(統議府)의 직제 및 인물 배치에 불만을 품은 군민대표가 만주 환인현(桓仁縣)에서 국내 일본기관의 파괴를 목적으로 조직한 의군부도 있었으나,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府, 1924)·신민부(新民府, 1925) 등에 통합·흡수되었다.

참고문헌

『한국 민족 독립운동사 연구』(신용하, 을유문화사, 1985)
『무장독립운동비사』(채근식, 대한민국공보처,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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