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년 1월 18일 전라남도 광주군 광주면에서 강호일의 7남 4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형제 중 상당수가 전라남도 지역 사회주의 운동 및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형 강석봉은 광주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후 전조선노농대회 준비위원, 전남청년연맹 및 광주청년연맹 집행위원, 조선공산당 전남 책임비서 등을 역임하였다. 동생 강석원은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옥고를 치렀고, 또 다른 동생 강영석은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에서 활동하고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하였다.
광주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한 후 임시교원양성소를 거쳐 사립 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1920년대 중반 전라남도 지역 청년운동 단체의 중심인물로 활동하는 한편, 사회주의 단체로 활동 반경을 넓혀나갔다. 1926~1927년 전남청년회연합회와 전남청년연맹 위원을 맡으며 청년운동에 앞장섰다. 1927년 3월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하여 광주 지역 조직원으로 활동하였다. 1927년 11월에는 광주청년동맹 창립에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는 한편, 광주고등보통학교, 광주농업학교 등을 중심으로 결성된 학생 비밀결사 성진회(醒進會) 출신들을 지도하면서 광주 학생운동계를 이끌어 나갔다.
또한 형 강석봉과 함께 전라남도 각지에서 청년연합대회를 열고 순회강연을 다니며 입지를 다졌다. 그리고 사회주의 진영이 중심이 된 광주 지역 민족연합전선 구축에도 앞장섰다. 1927년 10월 신간회 광주지회가 설립되자, 그해 12월 간사로 선출되었다.
성진회 출신 청년들을 지도하던 강해석은 1928년 4월 이경채(李景采)의 항일 격문 배포 사건에 관련되어 3개월여간 옥고를 치렀다. 1929년에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다시 구속되어 징역 2년 형을 선고받았다. 복역 중 광주학생운동과 성진회 사건이 터지면서 1년 형이 추가되어 총 3년간 옥고를 치르고 1932년 8월 9일 만기 출옥하였다.
전라남도, 광주 지역 사회주의운동과 청년운동을 이끌던 강해석은 일본 경찰의 요주의 대상이었다. 1932년 11월 3알에는 광주학생운동 3주년이 된다는 이유로 경찰서에 끌려가 26일간 구금되기도 하였다. 광복 이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 전남지부 부위원장과 학무부장을 역임하였다.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