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2월 중순경 도쿄(東京) 유학생 정광호(鄭光好)가 조선청년독립단 명의의 「2·8선언서」를 광주 청년들에게 전달하였다. 서울의 개신교 신자들과 광주의 개신교 신자 김철(金喆, 본명 金福鉉)·최흥종(崔興琮)과의 사이에 만세 운동에 관한 연락이 있었다.
3월 5일 밤 양림동(楊林洞) 남궁혁(南宮赫)의 집에서 강석봉(姜錫峰)·김강(金剛, 숭일학교 교사)·김용규(金容圭)·서정희(徐廷禧)·최병준(崔炳俊, 숭일학교 교사)·최영균(崔瑛均)·최한영(崔漢泳)·한길상(韓吉祥)·황상호(黃尙鎬) 등이 회합을 갖고 3월 8일 큰 장날을 기하여 만세 운동을 펼치기로 계획하였다. 그러나 준비와 연락 문제로 3월 10일로 연기되었다.
광주의 3·1운동은 1919년 3월 10일 부동교(不動橋) 아래 작은 장터(광주군 광주면 부동정)[현 광주광역시 동구 불로동 174 일대]에 약 1천 명이 모여 시작되었다. 양림동 쪽에서 개신교인들과 숭일학교·수피아여학교 학생들이 광주천을 타고 내려왔고, 광주공립농업학교 학생들과 시민들은 북문통(北門通)에서 모여들었다. 지산면(芝山面) 쪽에서는 수백 명의 농민들이 몰려왔다. 시위 군중이 모여들자 숭일·수피아 학생들은 「독립선언서」와 태극기 등을 나누어 주었으며, 만세 시위 주도자들은 큰 태극기를 높이 들고 시위 군중을 이끌었다. 시위 행렬은 서문통을 지나 광주지방법원(광주군 광주면 북성정 14)[현 광주광역시 동구 금남로 3가 1-11] 앞을 지나 광주경찰서(광주군 성내면 성안)[현 광주광역시 동구 금남로 2가 35 충장서점] 앞으로 모여들었다. 시위 행렬이 우체국 앞에 이르렀을 때 일본군 무장 기마 헌병대가 출동하여 100여 명을 체포하였다.
이튿날인 3월 11일 숭일학교와 광주농업학교 학생들이 선두가 되어 300여 명의 승려들과 함께 만세를 부르며 시위행진을 하였다. 3월 13일에는 광주읍 큰 장날을 이용하여 1000여 명의 군중이 만세를 부르고, 일부는 시위행진을 하였다. 3월 16일에는 송정면(松汀面) 송정리(松汀里) 정거장 앞 광장에서 보통학교 학생 및 시민들이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불렀다.
한편 기독교인이자 제중의원(濟衆醫院)[현 광주기독병원]의 회계로 있던 황상호 등은 문서 배포를 통한 독립운동 확산의 필요성을 느끼고 제중의원 지하실에서 등사판을 이용하여 『조선독립광주신문』을 제작하여 배포하였다. 제1호는 1919년 3월 13일 300부가 제작되었고, 제4호까지 발행되다 일경에 적발되었다.
강석봉·김강·김범수·김철·김태열·이윤호(李潤鎬)·이창호(李昌鎬)·최병준·최영균·최정두(崔正斗)·최한영(崔漢泳)·한길상을 비롯하여 80여 명이 소위 제령 위반(制令違反)에 의한 유죄 선고를 받았다. 그 중 1년 이하의 형이 선고된 사람 중에는 박애순(朴愛順)·진신애(陳信愛) 등 수피아여학교의 교사·학생 17명과 강대년(姜大年)·신의영(申義永) 등 숭일학교의 교사·학생 28명이 있었다.
광주의 3·1운동은 3월 10일부터 16일까지 진행되었으며, 학생과 시민, 승려와 기독교인 등 각계각층이 참여하였다. 운동 기간 중 『조선독립광주신문』이 제작되기도 하였으며, 이후 담양·화순·곡성·영광 등의 3·1운동에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