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6년 평양에서 태어났다. 중국에서 활동할 당시 강병학(康秉鶴), 강병학(康炳學), 강병학(姜秉鶴) 등의 이명과 마루야마 쓰루키치[丸山鶴吉]라는 일본식 이름, 장중광(張重光), 중광(仲光), 장운(張雲) 등의 중국식 이름을 사용하였다.
과일 행상을 하던 아버지가 8세에 사망하였고, 12세 때는 어머니와 형 강병걸(康秉杰)이 연이어 세상을 떠났다. 이후 2살 터울의 누이 강병옥(康秉玉)과 생활하였다. 평양 상수공립보통학교(上需公立普通學校)에 입학하였는데, 중도에 그만두어야 하는 어려운 경제 사정 속에서도 누이의 지원을 받아 성장하였다. 1933년 신의주를 거쳐 중국 상하이[上海]로 넘어갔다.
1934년 상하이 해녕로(海寧路)에 있는 모리무라자동차부[森村自動車部]에서 수리 직공으로 일하다가 한국독립당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을 모색하였다. 이 무렵 상하이에서는 윤봉길의 홍커우공원[虹口公園] 의거 이후 새로운 의열 투쟁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이러한 배경 속에서 병인의용대(丙寅義勇隊)가 한국독립당의 특무대로 개편되었다. 박창세(朴昌世)를 단장으로 하는 특무대는 제2의 윤봉길의거를 계획하여, 일본이 중국과 맺은 임시 휴전협정 2주년에 맞추어 투탄 의거를 추진하였다. 이때 강병학이 이 의거의 실행자로 지목되었다.
휴전협정 기념일인 1934년 3월 3일, 일본의 군관민이 상하이신사에 모여 상하이사변 전몰 군인에 대한 초혼제를 열었다. 행사에는 아리키치[有吉] 공사, 이마무라[今村] 제3함대 사령장관, 스즈키[鈴木] 육군무관, 야스이[安井] 거류민회행정위원장을 비롯한 일본인 유력자들이 참석하였다. 식이 끝난 10시 50분경 강병학은 회중전등형 폭탄 1개를 투척하였다. 폭탄은 불발하였으나, 2백여 명의 참석자들을 혼란에 휩싸이게 한 사건이었다. 강병학은 의거 후 경찰의 추적을 따돌렸다. 하지만 일본 측은 조사 끝에 강병학의 신원을 확인하였고, 그의 집을 뒤져 서류와 조소앙의 『유방집(遺芳集)』을 발견하였다.
의거 후 강병학은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와 광둥군관학교 등을 졸업하고, 1935년까지 한국독립당에서 활동하였다. 1937년 조선민족혁명당으로 당적을 옮겼으며, 조선의용대 창립 대원이 되어 제1지대 지대장 등을 맡았다. 광복 후 북한으로 입경하여 조선인민군 철도사단장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1956년 ‘8월 종파사건’으로 일어난 연안파 숙청 때 실각한 것으로 알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