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중국 연안을 중심으로 항일투쟁을 하다가 해방 후 입북한 조선의용군 출신의 정치집단.
개설
설립목적
연안파 세력은 1946년 2월 16일 조선신민당을 창당하여 김두봉을 위원장으로 선출하고 소시민, 인텔리, 중산층을 지지기반으로 정치적 입지를 확대하고자 하였다. 북조선 공산당은 1946년 8월 28일부터 30일까지 합당대회를 개최하고, 당 명칭을 ‘북조선 노동당’으로 개칭하고 위원장에는 김두봉, 부위원장에는 김일성, 주영하를 선출했다.
연원 및 변천
이들은 소련군사령부의 보류로 입북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여러 가지 정치적인 고려로 동년 11월 중순 소련군 제25군 밴꼬프스키의 입국허가를 통해 입북하게 되었으나 이미 소련파와 빨치산파에 의해 정치적 주도권을 빼앗기고 난 후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입북한 조선의용군은 공산당 평북도당이 지정하는 신의주 중학교에 숙소를 정하고 각계각층의 환영도 받았으나 그날 밤 평안북도 보안부장 한웅이 지휘하는 보안대에 의해 기습적으로 무장해제를 당하고 다시 안동으로 축출되는 사건도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소련이 김일성으로 하여금 북한을 장악하게 하려는 정치공작이 계획되어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한편 김일성은 1946년초 각 도 철도보안대를 창설해 나가는 과정에서 빨치산파, 소련파 외에도 연안파인 주연, 유용구, 조소향, 백낙철, 김만영 등을 기용하였으며, 또 북조선중앙보안간부학교를 창설하는데 빨치산파가 중심이 되고, 연안파 출신 박효삼(朴孝三), 김강 등 30여명을 참가시켰다.
그러나 이들 연안파 세력들은 상당수가 6·25전쟁 기간 동안 김일성과 빨치산파에 의해 패전책임 전가로 제거되기 시작하였다. 무정, 김한중 등이 첫 대상이었다. 무정은 연안파의 거두로서 전략전술에 뛰어나 김일성에게는 눈의 가시 같은 존재였다. 결국 무정은 1950년에 패전의 책임으로 제거되었다.
기능과 역할
동년 8월 30일부터 당 중앙위 제3기 8월 전원회의가 개최되었고, 이 회의에서 최창익, 박창옥, 윤공흠 등이 김일성 노선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연안파의 김일성에 대한 도전은 바로 이 회의를 통해 외부에 표출되었다. 직업 총동맹의 위원장인 연안파의 서휘는 직업 동맹의 노동자들이 기본적인 생활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정치적 자주성과 파업의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발언하였고, 연안파의 윤공흠은 김일성에 대한 개인숭배를 비판하였고 최창익은 중공업의 치중을 비난하고 경제계획을 개편할 것을 촉구하였다. 김을규는 인민군의 전통이 빨치산이 아니라 농민운동에서 계승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연안파로서 조선 인민군 정치 국장이었던 최월종과 최종학 같은 군 주요 지휘관들도 최창익 일파의 움직임에 동조하였다.
현황
의의와 평가
참고문헌
- 『북한의 당, 국가기구, 군대』(세종연구소 북한연구센터, 한울, 2007)
- 『조선노동당연구』(이종석, 역사비평사, 1995)
- 『북한인민군대사』(장준익, 서문당, 1991)
- 『남로당 연구』(김남식, 돌베게, 1984)
- 『한국전쟁과 노동당전략』(김점곤, 박영사,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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