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장 김치보(金致寶), 고문 이순(李舜), 재무 천수점(千手漸)이었다.
1919년 3월 ‘노인동맹취지서’에서 독립을 회복하지 못하면 해외에서 각고 끝에 전택(田宅)과 금전을 마련해 자손에게 남겨주거나 학문과 기예를 전수하더라도 근본적으로 다른 민족의 노예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므로 노인동맹단을 구성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당시 국내에서 3 · 1운동이 전개되자, 해외이주민사회에서도 이에 호응해 청년지사들이 국내 진공을 위한 무장독립단체를 조직하였다. 이에 노인들도 동지 규합과 자금 모금을 목적으로 신한촌(新韓村) 덕창국(德昌局)에서 이 단체를 결성했던 것이다. 회원자격은 46세 이상 70세까지의 남녀 노인으로 회원은 50명, 본부는 덕창에 있었다.
이 단체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곽단체로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사업을 지원, 협조하였다. 단장 김치보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시베리아 동포사회에 대한 연통제(聯通制) 실시를 위해 부총판(副總辦)에 선정되었다.
총판으로 선정된 최재형(崔在亨)의 암살로 연통제 실시는 좌절되었으나, 노인단의 결성은 연통제 실시의 연장선상에서 조직된 것이다.
1919년 5월 대표 이승교 · 윤용옥 · 김학영 · 안태순(安泰純) · 차대유 등은 일본의 왕과 조선총독 앞으로 ‘노인단취지서’를 보내 일제의 우리나라 강점을 규탄하였다. 그 해 6월에는 대한민국노인동맹단 대표 김치보 · 박희평(朴熙平) · 박은식(朴殷植) 등 27명의 명의로 ‘독립요구서’를 보내기도 하였다.
또한, 5월 상순경에도 요하현(饒河縣) 지부장인 강우규(姜宇奎)가 단원 이발(李發) · 정치윤(鄭致允) 등 5명과 서울에 도착, 5월 31일 보신각 앞에서 연설하였다. 그 뒤 군중들과 시위할 때 적의 기동대에 붙잡힐 위기에 처하자, 이발은 자결, 순국하였다.
한편, 사이토[齋藤實]가 제3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한다는 것을 알게 된 강우규는 우수리역[烏蘇里驛]에서 러시아 사람으로부터 구입해온 폭탄을 9월 2일 남대문 앞에서 마차에 오르던 신임 총독 사이토를 향해 던져 3명을 즉사시키고, 34명을 부상시켰다. 강우규는 11월 29일 순국하였다. 이 거사로 노인단의 활약상이 널리 알려졌으나 1920년 4월에 해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