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국권 강탈 이후, 일제는 이른바 무단통치로 한국민을 철저히 탄압하였는데, 그 결과 1919년 3·1운동이라는 거족적 항일 시위가 일어났다.
이에 일제는 임시적인 미봉책으로 하세가와(長谷川好道)를 파면하고, 사이토를 새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현역 해군 대장인 사이토는 부임하기 전에 이미 한국민을 기만하기 위해, 이른바 문화정치를 표방하여 내외의 주목을 받았던 인물이다.
국권 상실 이후 만주로 건너가 각지를 전전하던 강우규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노인층 지사들이 조직한 노인동맹(老人同盟)에 가담하였다. 여기에서 그는 사이토 신임 총독을 암살할 것을 결심하고, 원산을 거쳐 서울로 잠입하였다.
1919년 8월 초순, 강우규는 안국동 소재 이도제(李道濟)의 집에 도착하여 기거하면서, 신임 총독의 부임 날짜가 확정되기만을 기다렸다. 마침내 부임 날짜가 정해지자 미리 서울역에 나가 부근의 지형을 살피고 세밀한 계획을 세웠다.
9월 2일 오후 5시, 드디어 사이토 총독 일행을 실은 열차가 서울역에 도착하였다. 이 때 서울역 주위에는 국내외 기자들을 비롯하여 총독부 관리 등 많은 출영객들로 크게 혼잡하였다.
총독 일행은 열차에서 내려 출영객 및 기자들에게 답례하며 귀빈실로 들어갔으나, 얼마 뒤 여기에서 나와 쌍두마차를 향해 걸어 가고 있었다. 이 때 암살 기회만을 엿보며, 역사(驛舍)에 은닉해 있던 강우규는 사이토가 마차에 오르려는 순간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폭탄은 마차에 미치지 못한 지점에서 폭발하여, 사이토 총독 암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다만, 사이토의 마차와 옷에 파편이 스쳤을 뿐, 아무런 상처도 입히지 못했다. 그러나 경기도 경시(警視) 스에히코(末弘又二郎), 육군 소장 무라다(村田信乃) 등 출영객 3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강우규는 거사가 실패하게 되자 후일을 기약하고 잠적했으나, 일제 경찰에 의해 9월 17일 임재화(林在和)의 집에서 잡혀 1920년 11월 순국하였다. 또한, 최자남(崔子南)·박정찬(朴貞燦)·허형(許炯) 등 10여 명도 공범혐의로 잡혔다.
사이토저격의거는 한민족의 불굴의 독립 의지를 뚜렷이 보여주는 사건이었으며, 한국독립운동사에 일대 전기를 가져왔다. 의거를 계기로 독립운동 방략에 전환을 가져와 3·1운동에서 표방된 비폭력노선이 점차 폭력 투쟁 노선으로 전환되어 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1920년대에 들어서는 철저하게 폭력, 파괴주의 노선을 견지한 의열투쟁이 치열하게 펼쳐졌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