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재형(在衡) · 도헌(都憲). 러시아 이름은 뻬돌쏘오 · 최뻬찌카. 함경북도 경원 출신이다. 9세 때 부모를 따라 시베리아 노우키에프스크[煙秋]에 이주하여 러시아에 귀화하였다.
러시아 군대의 어용상인(御用商人)으로 재물을 모아 부자가 되었고, 이후 관리가 되어 두 차례에 걸쳐 페테르부르크에 가서 러시아 황제를 알현, 5개의 훈장까지 받았다.
노우키에프스크 도헌(都憲)이 되어 연봉 3,000루블을 받게 되자 은행에 예금, 그 이자로 매년 교포 유학생 1명씩을 페테르부르크에 보내 유학시켰다.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러시아 해군 소위에 임명되어 경무관부속 통역관으로 활약하는 한편, 남부소집회감독(南部所集會監督)으로 러시아에 귀화한 교포들을 규합하여 항일전에 참전하였다.
1907년 8월 군대 해산을 계기로 해산 군인 다수가 러시아의 노우키에프스크로 모이자 이들에게 군량과 군자금을 제공하는 한편, 이범윤(李範允)으로 하여금 거사하게 하였다.
1908년 3월에는 해이그특사였던 이위종(李瑋鐘)이 군자금 1만 루블을 가지고 와서 군사의 사기를 높였다.
이를 계기로 다음 해에 해삼위(海蔘威)에서 이범윤과 같이 의병 600명으로 의진을 정비하고, 이 해 7월 대장이 되었다. 정예병 200여 명을 이끌고 함경북도 경원의 신아산(新阿山)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전멸시켰으며, 회령의 영산(永山)에서 일대 격전을 치르고 노우키에프스크로 돌아왔다.
1910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간되던 『대동공보(大東共報)』가 재정난에 빠져 폐간되자 이를 인수하여 재간행, 교포의 계몽과 항일사상 고취에 힘쓰고 일제의 침략 만행을 통박하는 등 언론투쟁도 전개하였다.
또한 노우키에프스크에 한인중학교(韓人中學校)를 설립하고, 이범윤으로 하여금 2세 교육에 힘쓸 수 있도록 한족민회(韓族民會)를 조직케 하고 회장에 취임하였다.
1919년 3 · 1운동이 일어나자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의 윤능효(尹能孝) 집에 동지 10여 명을 모아 놓고 재러한인대표로 2명의 위원을 파리강화회의(巴里講和會議)에 파견할 것과, 그 여비로 5만 루블을 거출할 것을 의결하고 구체적인 실천방안을 담당하여 활약하였다.
이 해 4월 10일 상해에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 제1회 임시의정원회의에서 초대 재무총장에 선임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노령(露領)을 근거로 계속 활약하였다.
1920년 4월 일제가 시베리아로 쳐들어오자, 재러한인의병을 모두 모아 시가전을 벌이던 중 김이직(金利稷) · 황경섭(黃景燮) · 엄주필(嚴周珌) 등과 같이 잡혀 살해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