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서울 출신. 아버지는 이범진(李範晉)이다. 7세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영국·프랑스·러시아 등 유럽 각국을 순회하였으며, 영어·프랑스어·러시아어 등 외국어에 능통하였다.
일찍이 러시아의 수도 페테르스부르크(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 주재 한국공사관 참사관인 아버지 이범진과 같이 생활하고 있었는데, 1905년 을사늑약에 의해 외교권이 박탈되면서 각국 주재 한국공사관이 폐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응하지 않고 이범진과 함께 페테르스부르크에 체류하면서 비공식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이 파견하는 3명의 특사 중의 한 사람으로 임명되었다. 정사 이상설(李相卨)과 부사 이준(李儁) 등과 페테르스부르크에서 합류하였다.
이범진의 지원으로 러시아황제에게 고종의 친서를 전하고 협조를 얻은 뒤, 6월 25일 헤이그에 도착하여 한국대표로서 회의장에 참석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프랑스어와 영어에 유창한 실력으로 각국 대표와의 외교교섭과 문서작성 등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신문기자단과 네덜란드의 현지 여론은 한국대표들의 주장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인 반면에 열강의 대표들은 냉담하였다. 특히 일본대표와 영국대표의 방해로 회의참석에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에 연명으로 일제의 한국침략을 폭로, 규탄하고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세계에 선언하였다. 그리고 공고사(控告詞: 고하는 글)를 프랑스어와 영어로 번역해서, 6월 27일 평화회의 의장과 각국대표들에게 제출하는 한편, 신문을 통하여 국제여론을 환기시켰다.
7월 9일 각국 신문기자단의 국제협회에서 유창한 프랑스어로 ‘한국을 위한 호소’라는 강연을 통해, 일제의 한국침략을 규탄하고 을사늑약은 일본이 무력으로 위협하여 강제로 체결된 것으로 무효이며, 한국의 국민과 황제는 한국의 독립과 세계평화를 열망하고 있으므로 세계가 한국독립에 협조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연설은 회합에 참석한 각국대표와 수행원들 및 참석한 모든 언론인들에게 큰 감동을 주어, 즉석에서 한국의 입장을 동정하는 결의안을 만장의 박수로써 의결하도록 하였다. 연설문이 헤이그에서 발행되던 신문 『헤이그 신보(Haagsche Courant)』에 보도되어 국제여론을 환기시키는 데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이때 이위종 등 세 밀사에게는 일본 통감부에 의한 궐석재판에서 종신징역형이 선고되었다. 7월 14일 헤이그에서 순국한 이준을 묻어 주고, 이상설을 따라 프랑스·영국·미국을 순방한 다음 러시아로 돌아갔다.
그 뒤 러시아에서 활동하다 숨졌으나 그의 말년의 행적은 연구 대상으로 남아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