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한촌 ()

근대사
지명
일제강점기, 러시아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한인 집단 거주지.
지명/행정지명·마을
인구
약 1만 명
행정구역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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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신한촌은 일제강점기에 러시아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한인 집단 거주지이다. 1870년(고종 8)대부터 한국인이 정착하였고, 1893년(고종 31)부터 러시아 당국에서 한국인 집단 거주지로 설정할 정도로 한인의 수가 늘어났다. 신한촌에는 자치단체, 독립운동단체 등이 생겨났고, 해외로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이 몰려들어 국외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항일운동은 제정 러시아의 압박을 받았고, 러시아 혁명 후 일제의 시베리아 파병, 1920년 ‘4월참변’으로 민족운동의 중심지는 북간도로 옮겨졌다.

정의
일제강점기, 러시아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한인 집단 거주지.
형성 및 변천

연해주 지역은 1858년까지 청나라 훈춘령 소속이었다. 그러나 1858년에 아이훈[愛琿] 조약 이후 러시아와 청나라가 공동으로 관리하였으며, 1860년 북경조약에 따라서 완전히 러시아의 영토로 귀속되었다.

이곳은 원래 변방의 조선인이 땔감과 집을 짓는 데 필요한 나무를 베어 오거나 건너가서 농사를 지어 먹고 살던 곳이었다. 이들은 19세기 전반까지 일시적으로 이동을 하던 조선인들이 19세기 중반에는 국경을 넘어 마을을 형성하고 정착 생활을 시작하였다. 또 1869년(고종 7)에 조선에 닥친 기근으로 국경의 6진 지역의 주민들이 북간도와 연해주로 대규모로 이주하였다.

연해주의 중심도시인 블라디보스토크[해삼위(海蔘威)]는 러시아 극동의 남단부 연안에 걸쳐 있다. 1860년(철종 12)대 해군 기지로 개항하였으며, 19세기 말에 러시아의 극동 정책이 활발해지자 경제적 · 군사적으로 중요성이 높아졌다. 또 1903년(광무 7)에 시베리아 횡단 철도가 개통되어 러시아 중심부로 가는 시작점으로 도시의 위상이 한껏 높아졌다.

블라디보스토크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에서 보낸 군수품과 철도 장비를 들여오는 태평양의 주요 항구로 기능하였다. 하지만 러시아 혁명과 1918년에서 1922년에 일본군이 시베리아로 출병하여 이 지역은 커다란 타격을 입었고, 1930년경까지 복구 작업이 계속되었다.

한인들은 1870년(고종 8)대부터 블라디보스토크에 모여들기 시작하였는데, 1886년(고종 24)에 400명이던 한인이 1891년(고종 29)에는 840여 명에 이르렀다. 한인이 늘어나자, 1893년(고종 31)에 시의 행정 당국에서 블라디보스토크의 한 구역을 한인의 집단구역으로 설정하여 주었다. 이곳은 ‘카레이스키 스카야’, 즉 ‘고려인 거리(한인거리)'라는 공식 도로명이 붙여졌다.

1911년에 페스트콜레라가 창궐하자 러시아 당국은 한인 집단 거주지를 시 외곽으로 옮기고 이 일대를 기병대 숙소로 사용하였다. 시 서북편의 외곽에 새로 설정된 새로운 거주지를 한인들은 ‘신한촌’이라고 불렀다. 신거주지는 구거주지에서 북쪽으로 2km 떨어져 있었고, 아무르(Amur)만의 동쪽 해안지대 라게르니곶과 쿠즈네초프곶 사이의 언덕 일대에 위치하였다. 산비탈에 위치하여 높고 건조하였다.

구개척지에는 움막과 돌막집 등 한국식 집이 많았지만 신한촌의 가옥은 러시아풍 목조 건물로 지어졌다. 도로망도 러시아식으로 구획되었는데, 한국인들이 러시아식 삶에 적응해 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가옥은 온돌 방식으로 지어 전통적인 생활방식을 유지하였다.

신한촌에는 한인의 교육시설인 한민학교(韓民學校)가 설립되어 민족주의교육에 공헌하였다. 240명이 공부할 수 있는 시설이었다. 신한촌과 떨어져 있었지만 조선사범대학 · 원동고려사범대학과 같은 고등교육기관도 있었다.

자치조직으로 신한촌민회(新韓村民會)가 있었다. 회장, 부회장, 평의원 20여 명이 기구를 이루었고, 한민학교 운영, 신한촌 내에서 한인의 권리 보호, 시 당국과의 여러 사안을 협의하는 역할을 하였다. 신한촌의 한인은 1911년에 총 1,500명이었지만 1915년에는 약 1만 명에 달하였다.

독립운동의 중심지로 성장

한일병합을 전후하여 신한촌에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이 몰려들었다. 의병운동에서 애국계몽운동에 이르기까지 여러 노선을 지닌 독립운동가들이 몰려들었다. 한인을 바탕으로 권업회, 노인동맹단 한민학교, 고려극장 등 독립운동단체를 조직하였다. 3 · 1 운동 직전에는 대한국민의회가 설립되어 한국인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일제는 신한촌을 주목하여 외곽 약 1km 지점에 영사관을 두고 신한촌을 중심으로 한 항일민족운동의 동태를 감시하였다.

1910년대 초기에 항일 활동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것은 권업회(勸業會)의 항일운동이다. 권업회는 1911년 5월부터 1914년 9월까지 활동한 한인 결사이다. 계몽활동과 민족주의 교육을 실시하고 실업을 권장하여 한인사회의 정치적 · 사회적 향상을 도모하였고 성장한 한인의 역량을 기반으로 독립전쟁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1914년 신한촌에서 조직된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 政府)는 대한광복군을 조직하여 군사 행동을 감행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제정 러시아 당국은 러시아에서 한인의 독립운동을 저지하고자 하였으며 이에 따라 권업회와 대한광복군정부는 사라지게 되었다.

제 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 이후의 신한촌

신한촌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되던 항일민족운동도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제정 러시아의 압박을 받았고, 이후에는 민족운동의 중심지를 북간도로 옮기게 되었다. 러시아 혁명 후 1920년 1월에 러시아 혁명군이 블라디보스토크를 장악하였다. 한인들은 한인사회당을 만들고 한인 청년을 혁명군에 입대시키기도 하였다.

한편 일제는 제정 러시아를 지원한다는 명분 아래 시베리아에 군대를 파병하였다. 일제는 1920년 4월 4일에 러시아군이 일본군을 공격하자 이를 발단으로 4월 5일 신한촌에 들어가 가택을 수색하고 조선인을 체포하였으며 건물에 불을 질렀다. 이른바 ‘ 4월참변’을 일으켜 수많은 독립운동가와 신한촌 한인이 일제에 탄압을 받았다.

이후 연해주의 여러 지역에 친일단체가 설립되었으며, 신한촌에는 1920년 4월 블라디보스토크에 조선인 거류민회가 만들어졌다. 신한촌 거류민회는 다른 지역과 달리 독립운동가 출신이 거류민회의 구성원이 되었다. 이들은 적극적인 친일보다 한인의 생존과 한인사회의 재생산을 도모하는 일을 하였는데, 주로 한인에게 식량을 공급하고 병원을 설치하였으며, 학교를 보수하거나 재건축하는 일에 집중하였다. 그렇지만 일제의 회유와 비호 아래 신한촌 조선인민회, 신한촌 동촌(東村) 조선인민회 등 친일 단체들이 만들어졌다.

1922년 10월 25일에 일본군이 철수하고 러시아 볼셰비키가 블라디보스토크에 돌아오면서 친일 조직은 해체되었고, 공산당원에 의하여 ‘한인민회’가 조직되었다. 1924년에는 신한촌에 한국어 서적을 갖춘 ‘고려인 도서관’이 생겨서 한인들에게 큰 문화적 자긍심과 지식 계발의 기회를 주었다. 1937년에 극동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기 전까지 신한촌에서 한인 활동은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참고문헌

단행본

박환, 『페치카 최재형』(선인, 2018)

논문

정은혜, 「경관을 통해 살펴본 문화역사관광지로서의 블라디보스토크 고찰: 신한촌과 아르바트 거리를 중심으로」(『한국도시지리학회지』 22-2, 한국도시지리학회, 2019)
정 막래, 주동완, 「1924년 극동지역 최초 신한촌 고려인 도서관에 관한 연구」(『한국학』 41-2, 한국학중앙연구원, 2018)
박환, 「러시아혁명 이후 블라디보스토크 조선인거류민회의 조직과 활동」(『한국민족운동사연구』 90,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7)
정막래, 임영상, 「1920-30년대 극동지역 신한촌의 반종교운동: 『선봉』에 기초하여」(『외국학연구』 35, 중앙대학교 외국학연구소, 2016)
배항섭, 「19세기 후반 함경도 주민들의 연해주 이주와 인정 원망」(『역사와 담론』 53, 호서사학회,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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