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급 법정감염병에 속한다. 구토와 설사가 주 증상이며, 위생시설 및 환경위생이 나쁜 곳에서 발생되며, 오염된 식수·음식물·어패류를 먹은 후 감염된다.
예로부터 우리 나라의 각종 문헌에서는 괴질(怪疾)·윤질(輪疾)·윤행괴질(輪行怪疾)·진질(沴疾)이라고 하였으며, 이 중에서도 괴질이라는 말이 가장 흔히 사용되어 왔다. 이 밖에도 괴진(乖沴)·습온(濕瘟)이라는 용어가 쓰여 왔고, ≪오주연문장전산고≫에 따르면 마각온(麻脚瘟)이라 불렀으며, 고종 때 쓰여진 ≪의종손익 醫宗損益≫에는 서습곽란(暑濕霍亂)이라는 병명이 붙여져 있다. 그 뒤 1899년 9월에 내부령(內部令) 제20호로 <호열자(虎列刺) 예방규칙>이 반포되었는데, 이를 통하여 콜레라를 한자어로 호열자라고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의학적으로 볼 때 콜레라의 발상지는 인도이다. 처음에는 풍토병으로 인더스강 유역에서 유행을 거듭해 왔으나, 1817년 이후 인적·물적 교류가 세계적으로 활발해지면서 널리 만연되었다.
1817년에 벵골(Bengal) 지방에서 시작된 콜레라는 이듬해 12월에는 인도 본토로부터 스리랑카섬에까지 퍼져 나가고 다음해인 1819년에는 유럽에까지 전파되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웬트(Wendt)가 1885년에 발표한 <아시아형 콜레라 Asiatic cholera>에도 잘 나타나 있다.
1819년엔 동쪽으로도 그 유행이 퍼져 나가기 시작하여 미얀마 및 인도차이나에 퍼지고 그 해 5월에는 말라카반도에 침입하였으며, 이듬해인 1820년 자바 등 남양제도에 침입하고 또다시 중국 광둥(廣東)에 전파되어 서북 여러 지방에 유행하여 1821년에 이르자 난징(南京)과 북경 및 중국 전역에 퍼져 나갔으며, 1822년에는 중국 본토에서 본격적으로 대유행되었다.
이와 같은 중국의 콜레라 대유행은 또다시 동쪽으로 퍼져 1821년(순조 21) 여름에 산해관(山海關)을 통과하여 요동반도를 거쳐 동남하, 압록강을 넘어서 7월 하순에 평양에 들어와 우리 나라에서는 최초로 콜레라의 대유행을 보게 되었다.
그 뒤 황해도를 거쳐 중북부 지방에서 크게 창궐하고 경상도에까지 유행하였다. 이듬해에는 서울에서 크게 유행하고 황해도와 전라도·함경도·강원도에도 전파되고 제주도에까지 유행되어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무서운 유행을 보게 되었다.
1821년 평양 지방의 사망자는 수만명, 서울의 사망자는 13만명에 이르고, ≪오주연문장전산고≫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수십만 명이 사망하였다고 한다. 그 뒤 콜레라는 1822년 8월부터는 일본의 시모노세키(下關)에서부터 유행하기 시작하여 수많은 사망자를 내었다. 그 뒤 우리 나라에서는 콜레라의 유행이 여러 번 있었으나, 대개는 중국을 거쳐 요동반도로부터 들어오는 경로와 일본을 경유하여 들어오는 경우로 나누어졌다.
콜레라의 참상은 1821년 8월 13일의 ≪순조실록≫에도 잘 나타나 있다. 평안도관찰사의 보고에 따르면 “지난 7월부터 평양부성 안에 윤행(輪行)의 괴질(怪疾)이 돌아서 10일도 되기 전에 1,000여명의 사망자를 내었고, 경재(卿宰) 이상으로 사망자 15명, 그리고 일반 관리로 사망한 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으며, 서울을 합하여 15만 명의 사망자를 내었으며 평안도의 피해가 가장 컸다.”고 하였다. 짐작컨대, 이 병은 중국 동북 지방으로부터 유행되어 온 것이라 여겨진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뒤 8월 16일자의 ≪순조실록≫을 보면, 왕은 교지를 통해서 가벼운 죄수를 방면(放免)하고 윤질(輪疾)이 심해짐에 따라 오래된 죄수로 불쌍한 사람을 가려내어 그 벌을 감해 주도록 하였다는 기록도 나온다.
또다시 8월 17일자의 ≪순조실록≫에 보면 서장관 홍언모(洪彦謨)가 별단(別單)을 올렸는데, 그 내용을 요약해 보면 “연도(沿道)의 운기(運氣)가 대행(大行)하여 산해관(山海關) 이남 수천리 간에 죽은 사람을 헤아릴 수 없으며, 이 병의 유행은 남만(南蠻)의 백련교교도(白蓮敎敎徒)들이 독을 우물에 뿌리고 약을 오이밭에 발라서 시작된 것으로서, 백성들이 독이 발린 오이를 먹고 독수(毒水)를 마셔서 시작되었으므로 이들을 붙들어 조사해야 한다. ”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유럽에서 무서운 전염병이 돌 때마다 이교도(異敎徒)인 유태인을 속죄양으로 삼았던 것과 흡사한 점이 있다고 하겠다. 그 뒤 우리 나라에는 짧은 간격을 두고 콜레라의 유행이 더욱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정확하게 감별할 수 없었으므로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순조 21·22년에 걸친 1차 유행 이후에도 순조 33·34년에도 크게 윤질이 돌았고, 헌종 1년인 1835년과 철종 10년인 1859년, 그리고 철종 11년에도 진질이 크게 돌아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였다.
그 뒤 개화의 물결이 일기 시작하고 대외적인 교류가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고종 때부터는 자주 콜레라의 유행을 보게 되었다. 고종 16년인 1879년 6월에는 진질이 일본으로부터 부산에 전파되었음을 ≪일성록 日省錄≫은 분명히 하고 있다. 그 이후에는 2, 3년을 간격으로 하여 1881년에 대역(大疫)이 유행하였고, 1885년과 1886년 그리고 1890년에 콜레라가 유행하였음을 ≪일성록≫과 ≪인천부사 仁川府史≫는 기록하고 있다.
그 뒤 순종 때에도 계속 발생하였고, 광복 후 중국과 남방에서 철수해 온 사람들을 매개로 하여 크게 유행한 뒤, 우리 나라에서는 전형적인 콜레라 유행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물론, 1960년대에 ‘엘토르·콜레라’가 유행하여 여러 사람들을 긴장시켰으나 희생자는 별로 많지 않았고, 예방주사를 비롯하여 방역 사업이 본격화됨에 따라 1970년대 이후에는 거의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가 최근의 1980년·1991년·1995년에 유행 발생하였다.
콜레라균은 주로 오염된 식수나 음식물·과일·채소, 특히 연안에서 잡히는 어패류를 통해 경구감염되며, 장례식 등 많은 사람이 모이는 경우 오염된 음식물을 통해 집단발생이 일어날 수 있다.
환자의 구토물이나 분변 속에 배설된 콜레라균이 경구적으로 감염된다. 비행기 여행객이나 선반, 외항선원들을 통한 유입감염과 토착보균자에 의한 감염이 있다. 6시간에서 길게는 5일까지의 잠복기를 거치며, 대개 24시간 내외에 발생한다.
전형적인 증세는 잠복기가 지난 후 과다한 물설사가 갑자기 시작되며 복통은 없다. 심한 경우 쌀뜨물 같은 설사와 함께 구토·발열·복부통증이 있을 수 있으며, 극심한 설사로 인해 심한 탈수현상을 초래하여 적절한 치료를 하지 않으면 사망할 수도 있다.
설사변·구토물·직장에서 채변한 검체에서 콜레라균을 분리, 배양하여 확진하며, 면역혈청학적 시험, 박테리오파아지형별 등이 진단에 이용된다. 오염지역으로의 여행경력과 임상증상으로 추정진단하기도 한다. 콜레라 환자는 반드시 격리 치료해야 하며, 탈수정도를 파악하여 손실된 수분 및 전해질을 신속히 보충해 주면 된다. 항균제는 배균기간을 단축시키는 효과가 있으며, 테트라사이클린이나 박트림이 주로 사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