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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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종 때 동북방면의 여진족에 대비해 두만강 하류 남안에 설치한 국방상의 요충지. 즉, 종성(鐘城) · 온성(穩城) · 회령(會寧) · 경원(慶源) · 경흥(慶興) · 부령(富寧)의 여섯 진을 말한다.
내용 요약

육진은 조선 세종 때 동북방면의 여진족에 대비해 두만강 하류 남안에 설치한 국방상의 요충지이다. 고려 공민왕의 북진정책을 이어받은 조선 태조와 세종의 정책에 의해 종성·온성·회령·경원·경흥·부령에 설치되었다. 태조는 즉위 초에는 두만강 유역의 여진족에게 교역의 편의를 제공하는 등 회유하였으나 내습이 그치지 않았다. 세종 때에 이르러 여진족의 내분을 틈타 적극적인 북진정책을 시행하였다. 신설한 육진에는 도호부사 밑에 토관(土官)을 두고 남방 각 도의 인민을 이주시켜 개척시켰다. 두만강 이남이 모두 조선의 영역으로 편입되어 북방 경계가 획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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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세종 때 동북방면의 여진족에 대비해 두만강 하류 남안에 설치한 국방상의 요충지. 즉, 종성(鐘城) · 온성(穩城) · 회령(會寧) · 경원(慶源) · 경흥(慶興) · 부령(富寧)의 여섯 진을 말한다.
내용

육진은 대륙에서의 원 · 명교체기를 활용한 고려 공민왕의 북진 정책을 이어받은 태조 이성계(李成桂)세종의 진취적 정책에 의해 설치된 것이다.

1356년(공민왕 5) 쌍성총관부(雙城摠管府)의 회복에 이어, 이 방면에 대한 경략은 고려 말기 이성계의 아버지인 이자춘(李子春)이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朔方道萬戶兼兵馬使)로 있을 때부터 시작되었다. 이성계 또한 이 방면에서 무공을 세워 개국 초에 조선의 영역은 이미 대체로 두만강 하류에까지 이르렀다.

따라서, 두만강 유역의 가장 큰 여진 부족인 우디거족(兀良哈族) 및 오도리족(斡朶里族)과 대치하고 있었다. 이성계는 즉위 초부터 이들을 회유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태종 때에는 경원 · 경성에 무역소를 두고 여진족에게 교역의 편의를 제공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1410년(태종 10)에 이르러 경원부를 중심으로 우디거족 등 오랑캐의 내습이 잦아지자 다음 해에 부(府)를 폐지했다가, 1417년에 부거(富居)로 후퇴해 다시 설치하였다.

본래 경원부는 ‘흥왕(興王)의 땅’이라고 하여 태조 때부터 공주(孔州)를 설정하고 동북면 경영의 본거지로 삼았던 곳이다.

그 뒤 얼마 동안은 경성이 여진족 방어의 요충지가 되고 그 이북은 방치되었다. 그런데 세종 때에 이르러서도 여진족의 내습이 그치지 않자 1425년(세종 7)경부터 조정에서는 경원부를 다시 용성(龍城)으로 후퇴시키자는 의논이 강력하게 일어났다.

그러나 “조종(祖宗)의 옛 땅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없다.”고 하는 세종의 적극적인 북진책으로, 드디어 1432년에는 석막(石幕)에 영북진(寧北鎭)을 설치해 동북경의 개척을 본격적으로 착수하게 되었다.

1433년 우디거족이 알목하(斡木河) 지방의 오도리족을 습격해 그 추장인 건주좌위도독(建州左衛都督) 동맹가티무르(童猛哥帖木兒) 부자를 죽이고 달아난 사건이 일어났다.

세종은 이러한 여진족 내분의 기회를 포착해 김종서(金宗瑞)를 함길도도절제사에 임명하는 한편, 이징옥(李澄玉)의 무위에 힘입어 북방 개척을 과감하게 추진해갔다. 그리하여 그 이듬해인 1434년(세종 16)부터 육진이 설치되기 시작하였다.

먼저 이 해에 석막의 영북진을 백안수소(伯顔愁所)로 옮겨 이듬 해에 종성군으로 하고, 여진족 내침의 우려가 가장 많은 알목하에는 회령진을 신설하고 그해에 ‘부’로 승격시켰다.

또 부거에 있는 경원부를 회질가(會叱家)로 옮기는 한편, 공주의 옛터에 공성현(孔城縣)을 두었는데 이는 1427년에 경흥군, 1433년에는 또 ‘부’로 승격되었다.

그 뒤 경원과 종성의 위치가 두만강에서 너무 멀다 하여 1440년에 종성군을 백안수소로부터 수주(愁州)로 옮겼다. 또 다온평(多溫平)에 군을 설치해 온성군으로 하고 이듬 해 이들을 각각 종성부 · 온성부로 승격시켰다.

1442년에 훈융(訓戎)에서 독산연대(禿山烟臺)까지 강을 따라 장성을 쌓고, 1449년(세종 31)에는 석막의 옛터에 부령부를 설치해 이른바 육진의 완성을 보았다.

신설된 육진에는 각 도호부사(都護府使) 밑에 토관(土官)을 두고 남방 각 도의 인민을 이주시켜 개척시켰다. 그 결과 장성 밖의 약간의 지역을 제외하고는 두만강 이남이 모두 조선의 영역으로 편입되었다.

이후 육진 설치에 압력을 느낀 여진족, 특히 오도리족은 대부분이 서방으로 이주해 파저강(婆猪江) 부근의 오랑캐족인 건주위(建州衛)와 합류하였다.

1434년 이래 10여 년간에 걸친 육진의 개척은 서북방면의 사군 설치와 아울러 세종의 훌륭한 업적의 하나로 평가되었다. 즉, 이를 계기로 우리나라의 북쪽 경계가 완전히 두만강 · 압록강 연안에까지 뻗치게 되었다.

참고문헌

『세종실록(世宗實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이징옥(李澄玉)과 육진(六鎭)」(김성준, 『사총』 12·13, 1968)
「조선초기 북방개척과 농업개발」(이경식, 『역사교육』 52,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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