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9월 9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고려인 구락부 소인예술단들을 기초로 하여 창설된 이동 고려극장은 1937년 고려인의 중앙아시아 한인 강제이주 과정에서 카자흐스탄으로 이동되어 크즐오르다주립 고려극장, 탈틔쿠르간주 고려인음악극장을 거쳐 1968년 카자흐스탄 공화국 고려인 음악코미디극장의 지위로 격상되었으며, 카자흐스탄 독립이후에도 구소련권 뿐만 아니라 해외 한인공동체서 형성된 공연단체 가운데 가장 오래된 단체로 지금도 중앙아시아, 러시아, 한국 등을 주요 활동영역으로 활발한 공연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소련시기의 고려극장은 소련 국가기관으로, 이 시기 소련의 개별 민족 극장들은 여러 민족들로 구성된 인민들의 사상교육을 위한 공간이었다. 개별 극장들을 통해 소련은 소련 예술의 미학적인 원리를 실현하며, 공산주의 윤리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및 다민족집단간의 친선을 선전하는 기능을 부여하고 있었다. 따라서 소련예술 창작의 원칙이었던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을 다룬 작품들은 1980년대까지도 고려극장 상연작품에서 중요한 부분이었다. 1960년대 초반 동서화해무드기에 고려극장은 고려인의 생활이 반영된 연극을 무대에 올리기 시작했다.
소련붕괴이후 카자흐스탄을 중심으로 활동무대가 사실상 축소된 고려극장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선전선동 활동 기능은 사라졌고, 소련체제 붕괴이후 다민족사회로 변모한 카자흐스탄에서 말 그대로 소수민족 집단의 문화적인 자치와 특성 유지 측면에서 중앙아시아적인 한민족 고유문화전통의 보존과 발전, 그리고 역사적인 모국과의 문화적인 교류를 통한 한민족 공동체로서의 문화적인 정체성을 유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한반도와 전 세계를 통틀어 존재하는 한민족 공동체의 공연단체 가운데 가장 오래된 단체이다. 한반도가 일제 통치하에 있던 시기인 1932년에 소련의 연해주에서 한인동포인 고려인들은 비록 소련의 소수민족 정책의 일환에 따른 것이기는 했지만 한민족을 대상으로 하는 공연단체인 ‘극동지역 고려극장’을 설립하여 당시 소련 국가가 요구하고 있던 민족정책 차원의 활동목표 달성과 아울러 전통문화의 보존 및 전달 매체로 그 활동을 시작하였다.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초까지 소련 연해주의 고려인사회에서는 자발적으로 많은 예술 활동 모임들이 생겨났다. 블라디보스토크 소인예술단체들 가운데 가장 활동이 활발했던 대표단체는 신한촌 소인예술단이었다. 신한촌 소인예술단은 이후 고려극장의 토대가 되는 블라디보스토크 노동자청년극장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고려극장은 직접적으로 1930년 블라디보스토크 노동자청년극장 설립이 출발점이 되었다. 1932년 9월 9일에 소련 정부의 결정으로 직업적인 전문극장 성격의 극동지역 고려극장이 만들어졌고, 노동자청년극장 단원들이 여기에 흡수되었다.
1937년 강제이주 당시 극장 구성원 대부분은 카자흐 공화국 크즐오르다로, 일부는 우즈베크 공화국의 타슈켄트 인근 벡테미르로 이주했고, 이로 인해 두 개의 극장으로 나누어졌지만 상호간의 협조는 지속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중인 1942년 1월 13일 고려극장은 고려인들의 강제이주 최초 정착 지역 이었던 우슈토베로 이전되었는데,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특수한 상황으로 인해 국가로부터의 정상적인 지원이 불가능해짐에 따라 극장 집행부는 극장을 이끌어나가고 배우들을 유지하기 위해서 동포들이 밀집 거주하면서 벼를 재배하고 있었던 우슈토베 이전을 선택했다.
1953년 스탈린의 사망이후 흐루시초프가 집권하게 되면서 고려인들은 거주이전 제한이 풀리면서 이동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 이 시기부터 젊은 예술가 충원의 문제가 대두되어, 1955년에는 타슈켄트 극장-미술대학 배우과에 한국어반이 열리면서 고려극장을 위한 배우들의 양성이 시작되었다.
1959년 5월 30일 고려극장은 카자흐 공화국 정부의 결정에 따라 다시 원래 극장이 있었던 크즐오르다로 이전되어 크즐오르다주 주립 고려극장이 되었으며, 1964년 1월부터는 카자흐공화국 고려 음악연극극장으로 격상됨에 따라 소련 전역으로의 순회공연도 가능해졌다. 1960년에는 고려극장에 대학에서 전문 예술 연기자 교육을 받은 12명의 젊은 배우들이 입단하였다. 이들은 우즈베크 공화국 타쉬켄트 예술대학을 졸업한 전문 예술연기자 교육을 받은 한국어 공연이 가능한 고려인 배우들로, 이후 고려극장 주축 배우들로 성장하였다.
1968년 고려극장이 카자흐 공화국 수도인 알마티로 옮겨오면서 명칭이 카자흐공화국 국립 음악희곡 고려극장이 되었는데, 이는 고려극장이 주립극장에서 국립극장으로 승격되었음을 의미했고, 같은 해에 극장 공연팀의 일원으로 아리랑 가무단이 창설되었다.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북한 출신 한진, 명동욱 등이 고려극장 발전에 기여를 하였다. 이들은 1950년대초 소련으로 유학을 왔다가 유학 말기에 김일성 반대운동에 관여하여 북한 귀국을 거부한 정치망명자들이었다. 소비에트 카자흐 공화국 국립극장으로 격상된 이후 고려극장은 소련 전역 순회공연에 나섰고, 극장창설 50주년인 1982년에는 처음으로 모스크바 순회공연을 했다.
소련체제 붕괴이후 1990년대 들어와 고려극장을 이끌었던 극장장들은 변화하는 사회 및 문화 환경에서 고려극장이 자립할 수 있는 방안을 여러 차례 모색하였다. 1999년 말부터 고려극장이 카자흐스탄 고려인협회 산하로 재편되면서 효율적인 극장 운영을 위한 체계가 구축되면서 극장 역시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소련말기 및 소련붕괴이후의 체제전환기에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서 전문 예술인으로 육성된이른바 제5세대 젊은 고려인 예술가들이 고려극장에 충원되었으며, 카자흐스탄 고려인협회, 주카자흐스탄 한국대사관의 지원도 계속되었다.
1997년은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60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억하기 위해 강제이주의 기억이 반영된 연극인 ‘추억’이 공연되었고, 강제이주 60주년 기념행사 및 공연이 카자흐스탄에서 가장 큰 공연장인 알마틔의 공화국 궁전에서 고려극장의 주도로 개최되었다. 이러한 극장 전반의 활동뿐만 아니라 고려극장 연극 공연 역사에서도 1997년은 의미 있는 한해로 기록되는데 고려극장은 고려말이 아닌 한국표준어로「홍도야 울지마라」를 무대에 올리고, 1999년 8월에는 한국 현대극인「맹진사댁 경사」를 무대에 올림으로써 고려극장이 한국 현대희곡 작품도 소화해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2002년이 되면서 고려극장은 카자흐스탄 국가로부터 단독 건물을 받음에 따라 고려극장 전용극장의 시대를 열게 되었고, 연극에서는 한국과의 교류가 활성화됨에 따라 고려말이 아닌 한국어로 연극을 시도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고, 세계 각지에서 열리는 연극 페스티벌에 직접 참가하는 등 그 활동영역을 다양화하고 있다. 한국어로 공연을 올리고, 이를 즐길 수 있는 관객들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고려극장은 2006년부터 자체 연극인 양성과정을 운영하고 있으며, 단기적으로는 공연 프로그램 중간에 한국어가 필요 없는 러시아어 콩트나 노래, 한국 전통춤, 북한 전통춤, 카자흐 전통춤 등을 삽입하여, 고려말 연극중심의 단조로운 분위기를 탈피하고, 공연자체를 젊은 세대의 취향을 반영하고 있다.
1930년대 초 러시아 연해주의 고려인 아마추어 예술공연단체들에는 연극단과 함께 성악, 무용, 기악 등 가무협주단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당시 민족음악, 러시아음악, 유럽 음악의 보급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악단은 블라디보스토크시 협주단이었는데, 주로 고려인 음악가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협주단은 이후 고려극장의 음악단이 발전할 수 있는 기반역할을 하였다. 1961년 고려극장 음악감독에 임명된 정인묵은 고려인음악가들로 관현악단을 구성했고, 이 악단에 민족적인 특성과 현대성을 적절히 조합하였다. 음악단은 고려극장의 일원으로서 극장의 연극 및 무용단과 합동 공연을 하면서도, 음악단 자체적인 공연이 가능해졌다. 음악단은 더 역동적이고 전문적인 공연단으로 발전하게 되어, 이후 음악단이 고려극장 공연 레퍼토리의 일환으로 독립적인 프로그램이 될 수 있었다. 고려극장이 전문적인 공연집단으로 활동범위가 확대됨에 따라 고려극장 음악단의 활약도 늘어났는데, 이는 한국어를 이해하는 관객들이 감소함에 따라 한국어 공연에는 관람객이 줄어들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와는 상관없는 노래, 춤, 음악 공연에 대한 관람객의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1930년대초 러시아 연해주 아마추어 고려인 예술단체에서 기원하여 고려극장의 무용 및 음악 공연단으로 발전한 아리랑 가무단은 1970년대 중반부터 소련 전역 순회공연에 나서기 시작했다. 이러한 순회공연은 고려인들에게 민족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로 사실상 명절이나 다름없었다. 또한, 소련 지방 도시들에서는 고려인의 존재를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아리랑 가무단의 순회공연은 소련 제 민족간 유대강화 뿐만 아니라 한민족의 고유한 문화와 예술을 알림으로 인해 고려인과 다른 민족간 관계 발전에도 기여했다.
1990년대초 소련해체 이후 체제 변화에 따른 경제여건 변화로 사실상 국가의 지원이 단절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자 고려극장은 재정적으로는 고려인협회, 고려인 기업가, 그리고 중앙아시아에 진출한 한국기업 및 한국정부의 지원으로 카자흐스탄이 독립한 직후의 혼란기에도 그 명맥을 유지해왔다. 아울러 격년제로 개최되는 카자흐스탄 고려인문화예술축전을 통해 신세대 고려인 예술가들을 계속 충원하고 있으며, 각 지역 고려인협회 산하로 운영되어 있는 아마추어 예술단들과도 연계하여 이들에 대한 지도를 하고 있기도 한다.
카자흐스탄 독립이후에는 고려극장 산하 개별 공연단체들 가운데 한국어 구사능력보다는 공연측면의 역량이 요구되는 사물놀이, 퓨전밴드 같은 공연분야에서 젊은 고려인 예술가들의 활약과 기량 향상이 두드러지고 있는데, 젊은 고려인 예술가들을 고려극장에 충원하는 새로운 방식으로는 고려인협회가 후원하고 고려극장이 주관하는 고려인 문화경연대회가 부각되고 있다. 각 지역 고려인협회별로 출전하는 고려인문화경연대회에서는 동서양을 아우르는 다양한 공연장르의 경연이 이루어지며, 이 경연대회에서 분야별로 입상한 공연자들 가운데 본인들이 희망하는 경우에는 고려극장 전속으로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
소련체제 붕괴이후 고려극장은 소련시기에는 교류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던 한국의 관련 공연단체, 극장들과 적극적인 교류 및 공연활동에 나서고 있다. 1990년 고려극장은 한국의 국립극장과 자매결연을 맺었고, 또한 이 시기 한국의 모 방송국에서 제작된 고려인 관련 주제 역사 드라마「까레이스끼」에서 고려극장 배우들이 대거 출연했고, 카자흐스탄 현지제작에 적극적인 참여와 협조를 아까지 않았다.
1990년대 중반에는 알마티 한국교육원의 500석 규모 강당을 기반으로 하여 공연활동을 지속했으며, 2002년 극장 설립 70주년을 맞이하여 카자흐스탄 정부가 고려극장 단독건물을 배정하여 전용 상설공연장을 확보하게 되었고, 나자르바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은 개장식에 직접 참여하였다. 2006년 고려극장은 독립 이후 펼쳐온 적극적인 활동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아 명예훈장 수여와 함께 공식 명칭이 ‘명예훈장 수여 카자흐스탄 국립 고려 음악 및 코메디 극장’으로 변경되었다.
2000년대 중반이후 카자흐스탄의 경제가 성장하게 되면서 고려극장의 해외 연극제참여도 활성화되었고, 2006년에는 독일, 한국에서 진행된 국제연극제에 참가했다. 고려극장 창립 75주년이었던 2007년에는 한국의 관련단체와 협력하여「회상열차」프로젝트를 통해, 고려극장은 1937년 강제이주 당시의 경로를 따라 러시아 주요도시에서 순회공연을 진행했고, 카자흐스탄 각 주에서는 「고려인들의 행로」라는 제목으로 순회공연이 진행되었다.
2010년에는 고려극장의 주도로 서울에서「실크로드 국제연극제」가 개최되었는데, 이 축제에는 카자흐스탄에서 고려극장 이외에 3개의 다른 민족극장들이 참가하였으며, 이후 이 연극제는 상설연극제로 자리잡게 되었다.
한반도와 전 세계를 통틀어 존재하는 한민족 공동체의 공연단체 가운데 가장 오래된 단체이다. 소련체제하에서 공식적으로 설립된 한민족 극장인 블라디보스토크의 ‘극동지역 고려극장’은 중앙아시아로의 강제이주라는 환경 변화에도 불구하고 카자흐스탄에서 그 명맥을 유지하여, 2012년 극장설립 80주년을 맞이할 수 있었다. 해외 한민족 공동체의 공연단체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고려극장은 소련시기에 고려인사회 문화의 중심으로 그 역할을 해왔고, 소련해체 이후 독립국가연합체제하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통해 현지화 된 민족문화를 계승 및 발전시키는 민족문화 발전의 중추기관으로 역할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