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은 해방 이후 소련에서 『십오만원사건』, 『땅의 향기』 등을 저술한 작가로, 고려인이자 언론인이다. 1900년에 태어나 1979년에 사망했다. 1931년에 블라디보스토크의 노동학원을 졸업한 뒤, 『선봉』 신문사에서 근무하면서 문학가의 길을 걸었다. 1937년에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어 카자흐스탄에 정착했으며, 1946년부터는 한인신문사 『레닌기치』에서 근무했다. 그의 소설과 시는 당시 소련 극동 지역과 연해주 지역을 배경으로 독립군의 활동이나 지주 계급을 타파한 사회주의를 다루어 중앙아시아 한인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소련의 연해주와 중앙아시아 한인 사회를 대표하는 문학가이자 언론인으로, 대표 작품으로는 장편소설 『십오만원사건』등이 있다.
1900년 10월 4일에 김중섭의 차남으로, 러시아 연해주의 이만군 오인발촌에서 태어났다. 1931년에 블라디보스토크(Vladivostok)의 노동학원을 졸업한 뒤, 『선봉』신문사에서 근무하였다.
1933년에는 모스크바종합대학 철학부에 입학하였지만, 이후 학업을 포기한 채 1936년까지 포시예트(Posyet) 구역에 자리한 『레닌의 길』신문사에서 활동하였다.
1937년에는 여느 한인들처럼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어 카자흐스탄(Kazakhstan)에 정착하였으며, 1946년부터는 『레닌기치』로 이름을 바꾼 한인신문사에서 근무하였다. 그 뒤 여러 작품을 쓰면서 활동하다가, 1979년에 사망하였다.
『선봉』신문사에서 문학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이래, 1920년대 후반∼1930년대 초반에 『선봉』에 「국문타령」, 「한까이의 가을」등을 발표하였다. 1934년에는 알렉산드르 파제예프(1901∼1956)의 소설 『괴멸(Razgrom)』을 한글로 번역하였고, 수십편의 작품을 1958년에 『조선시집』으로 묶어 발표하였으며, 1960년에는 단편소설 『지홍련』를 썼다.
1962년에 카자흐스탄 작가동맹 크즐오르다(Kzylorda) 지부는 조선인 작가분과위원회를 조직하였는데, 이때 분과장을 맡아 오랫동안 활동하면서, 1963년에 단편소설 『심상건과 마까로브 일가』를 썼고, 1964년에 장편소설 『십오만원사건』과 함께시집 2권을 출간하였다. 1966년과 1968년에도 『주옥천』, 『쌍기미』를 발표하였다.
그의 소설과 시는 당시 소련 극동 지역이나 연해주 지역을 배경으로, 독립군의 활동이나 지주 계급을 타파한 사회주의를 다루었다. 특히 『십오만원사건』은 모두7장으로 구성되었는데, 1920년 1월 4일에 애국청년인 윤준희, 임국정, 최봉설(최계립), 한상호, 박웅세, 김준 등이 조선은행 회령지점에서 북간도 용정지점으로 운송되던 일화(日貨) 15만원을 탈취하였지만, 20여 일만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체포되어 처형된 사건을 배경으로 삼았다.
그는 고향인 연해주를 직 · 간접적으로 표현하거나 주제로 삼았는데,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나타내면서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당시의 창작 환경을 그대로 반영하였다. 이러한 점은 이후에 공산당원이 아니라는 이유와 함께 작가동맹에서 축출당하는 빌미로 작용되었다.
『십오만원사건』은 1971년에 러시아어로 번역되어 『조선소나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그밖에 『그에게 말하노라』, 『알리야』, 『나의 정깊은 시르다리야강』, 『카자흐스탄 땅』, 『메데오』등을 발표하였고, 1975년에 출간된 『땅의 향기』에서는 최초의 한인 여성공산주의 지도자였던 김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의 이야기를 다루기도 하였으며, 이 때에 소련 한인문학가로 한인극장에서 활동하였던 김진의 주도로 한글 시선집을 출간하기도 하였다.
뛰어난 문학적 재능으로, 49편의 장편서사시와 함께 여러 편의 장 · 단편소설을 창작하여, 소련 한인의 대표적인 한글 문학가로 중앙아시아 한인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