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혁명이후 조성된 사회적인 변화에 제정러시아 국적을 가지고 있었던 이주한인들(이하 원호인)은 주도적으로 대응했다. 1917년 5월 3일 신한촌 한민학교에서 임시발기회를 개최하고 6월 3일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각지방을 대표하는 총대들이 집결하여 노령한인협회를 조직하기로 결정. 2월 혁명이후 연해주 남부지역의 군촌회와 각지 공안위원회에서 한인들이 다수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나, 러시아인들이 배타적인 입장을 취하자 이에 불만을 가진 당시 러시아 국적을 가지고 있었던 한인들이 독립적인 단체를 만들어 자치를 도모했다.
노령한인협회 발기회는 한인들에게 배포한 노령한인협회발기회 통고서와 노령에 있는 동포제군에 고한다는 문건을 통해 러시아혁명이후 정치적인 자유화를 맞이하여 새로 구성될 국회에 한인대표 참가, 언론-집회 결사의 자유보장, 한인들의 지위 향상을 추진할 한인단체조직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이러한 과정에서 러시아 국적을 가지고 있었던 한인들이(원호인) 원호인의 자치와 권리 신장에 비중을 둔 협회를 만들었는데, 러시아 국적이 없는 한인의 참여를 배제하고, 항일주장을 명시화하지 않았다.
1917년 6월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이르쿠츠크 동쪽의 각지 대표 96명이 참가한 가운데 제1회 전로한족대표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서 대표들은 사회공안위원회, 농민동맹, 국민회에 소속된 인물들이 많았는데, 사회혁명당 계열의 원호인 지식인들이 주도한 대회는 여호인(비입적 한인) 농민대표들과 국민회 대표들에게 결의권을 부여하지 않았다.
이 대회는 혁명을 반대하는 러시아 임시정부에 대한 지지를 결정하고, 임시정부에 축전 발송을 결의했다. 아울러 원호인의 헌법제정의회 대표 파견, 원호인에 의한 한족 대표회의 조직, 농업용 토지문제 요구, 교회로부터 학교 독립, 정기간행물 출판, 촌 자치회의 제도에 조선의 제도도 참작할 것 등의 결의를 통해 원호인의 자치와 권리 신장에 비중을 두었다.
이와 아울러 대회 다수파인 원호인 70여명과 소수파인 여호인 30여명 대표들간의 합의가 결여된채 원호인들만으로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 본부를 둔 고려족중앙총회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김 야곱을 선출했다.
당시 하바로프스크는 볼쉐비키세력의 거점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는데, 이 지역 한인사회에서도 이러한 변화에 발맞추어 적극적으로 한인사회 조직화에 나섰다. 반볼쉐비키적 입장의 고려족중앙총회에 대한 항일적·친볼쉐비키적 한인들의 반발이 조직적으로 구체화되어 1918년 초에 한족중앙총회 발기회가 결성되었다. 주도인물들은 러시아정교 신부 출신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활동하다가 하바로프스크로 옮겨온 오 바실리, 러시아군 장교였던 유 스테판을 비롯한 하바로프스크지역의 한인지도자들 10여 인이었다. 발기인들은 고려족중앙총회가 여호인들을 배제한 점을 비판하고, 입적·비입적을 불문하고 ‘특별대동단결’케 하고 “식민의 발전과 국가장래에 필요한 교육보급과 실업진흥을 꾀할” 것을 목표로 내세웠다.
한족중앙총회의 발기소식에 접한 고려족중앙총회측에서는 한족중앙총회 발기회측의 ‘입적·비입적의 구분타파’, ‘대동단결주의’를 수용한다는 입장을 천명하고 한족중앙총회측과의 제휴·통합교섭에 나섰다. 고려족중앙총회는 회장 김보金甫가 민족적 입적·비입적을 불문하고 전체 한인들을 규합하여 한민족의 단합을 주장함으로써 한족중앙총회와 타협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리하여 1918년 1월 14일에서 21일에 걸쳐 김립·김도현·김종 등 2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하바로브스크의 인동에서 한족중앙총회를 조직하기 위한 지방대표자대회가 소집되었다. 여기에는 고려족중앙총회 회장인 김보도 참여하였다. 1918년 1월 17일 양측은 통합된 한족회를 결성하기로 합의하였는데, 그 결과 조직된 것이 전로한족중앙총회였다.
‘원호·여호 구분타파’와 ‘대동단결’이라는 대의명분에 따라 외형적 통합에는 성공하였지만, 반볼쉐비키적인 에스·알 즉 사회혁명당 주도의 시베리아독립정부를 지지하는 고려족중앙총회와 볼쉐비키정권을 지지하는 한족중앙총회의 대립적인 입장이 근본적으로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양측이 독자적인 힘으로 노령한인사회의 주도권을 장악하기에는 각자의 한계가 있었다. 양측은 일시적으로는 통합에 합의하였으나, 5개월 후에 개최될 헌장회의제2차 전로특별한족대표회의까지 한인사회에서 각자의 영향력 확대를 추구하였다.
러시아 2월 혁명이후 한인사회를 주도했던 러시아 국적 보유 한인들의 민족자치 우선 입장은 케렌스키 임시정부가 붕괴된 10월 혁명까지 지속되었다. 노령 전체 한인의 일대 단체로 조직된 고려족중앙총회는 6월 대회에서 10월 혁명후인 1917년 11월 25-27일 실시된 헌법제정의회 의원 선거에서 반볼세비키적인 시베리아 독립정부지지 입장을 채택했다.
6월 대회 결의에 따라 헌법제정의회 의석 배당의원회에 1개의 한인의석을 신청했다가 거부되자, 고려족중앙총회는 연해주지역 4개 의석을 두고 입후보한 극동의 9개 당파 가운데, 시베리아 정부 독립지지, 시베리아 독립시 선거에 한족대표 2인 참여, 5년이상 거주 한족에 대한 토지소유권의 인정 등 세가지 조건을 수락한 연해주 촌민회 후보 지지운동을 전개하여 당선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고려족중앙총회는 10월 혁명이후에도 반볼세비키적인 입장, 친시베리아 정부, 친사회혁명당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1918년 1월 10일 28명의 대의원이 참가한 지방대의원대회에서 시베리아 독립의회에 대표로 김기룡과 김 츄프로프를 파견했다.
1917년 6월 제1회 전로한족대표회의에서 러시아 국적 보유 한인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된 고려족중앙총회는 반볼세비키 입장을 명시하고, 러시아 국적을 보유하지 않은 한인인 여호인의 배제 조치는 이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이들에 의한 한족중앙총회의 설립을 가져왔다.
이후 고려족중앙총회측에는 한족중앙총회 발기회측의 러시아 국적 취득의 여부에 따른 구분타파, 대동단결주의 수용 입장을 천명하고 협상에 나섰는데, 1918년 1월14-21일 하바로프스크에서 한족중앙총회 조직을 위한 지방대표자대회에 고려족중앙총회 회장 김보가 참여했고, 1918년 1월 17일 양측은 통합된 한족회 결성에 합의하였다.
원호-여호 구분 타파, 대동단결이라는 대의명분에 따라 외형적인 통합은 성공했지만, 시베리아 독립정부를 지지하는 고려족중앙총회와 볼세비키 중앙정부를 지지하는 한족중앙총회 발기회측의 대립적 입장이 근본적으로 해소되지는 않았고, 양측 모두 독자적인 세력으로는 노령 한인사회 주도권을 장악할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고려족중앙총회가 한족중앙총회 발기회에 대등한 권리를 인정할 정도로 양보를 한 것은 10월 혁명이후 러시아 극동에서 볼세비키 세력이 점차 확대되는 당시 정세를 고려한 것이었다.
한족중앙총회 발기회도 타협하지 않을수 없었는데, 사회혁명당 세력이 시베리아와 러시아 극동의 드넓은 농촌지역에서 아직 확고한 우세를 확보하고 있었고, 대다수의 한인들이 시베리아 정부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양상은 결국 1917년 10월 혁명이후 한인사회가 정치적 이념에 따라 분화가 진행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였다.